본 연구는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의 <폴리-베르제르의 바 A Bar at the Folies-Bergère> (1882)에 나타나는 이원성들에 관한 연구이다. 마네가 죽기 일 년 전에 남긴 마지막 걸작인 <폴리-베르제르의 바>는 뒤틀린 원근법과 같은, 화면 구성 상의 문제에 있어 현재까지 수많은 수수께끼를 남기고 있는 작품이다. 본 연구는 그 수수께끼들을 풀기 위한 열쇠로써, 마네가 살았던 시대에 시대의 복잡한 상황에 초점을 맞추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프랑스의 1860-70년대는 왕정복고 시대의 잔재들과 새롭게 부상하는 신흥 부르주아의 개념들의 혼재로 인해 정치적인 갈등과 분열이 고조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시대적 자화상이 마네의 작품들, 특히 <폴리-베르제르의 바>에 내재된 모순 점들에 영향을 줬으리라는 기대 하에 시작되었다. 첫째로, 본 연구는 <폴리-베르제르의 바>에 나타나는 여급 쉬종(Suzon)의 포드에 주목하였다. 정확한 대칭적 구도로 인하여 영원성을 상징하는 쉬종의 포즈는 ‘이 마고 피에타티스(imago pietatis)’를 의미하는 마네의 다른 작품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포즈와 동일하다. 이런 점에서 쉬종은 전통성(traditionality)을 의미한다. 이와 반대로, <폴리-베르제르의 바>의 거울 속 이미지로 나타나는 쉬종의 포즈는 거울 밖의 그녀의 포즈와 다르게 보인다. 거울 이미지의 그녀는 거울 밖의 당당한 모습과는 달리 손님에게 공손하게 허리를 굽힌 포즈를 하고 있으며, 또한 그녀의 이미지는 일시적이고 흔들리고 있다. 이러한 일시적인 것, 흔들리는 모습은 또한 근대성 (modernity)의 특징이기도 하다. 둘째로, 본 연구는 쉬종이 그 당시 사회에 만연했던 여성 이미지의 두 축인 처녀와 매춘부를 모두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거울 밖에서 꽃과 과일 그리고 술과 함께 있는 쉬종은 앵그르(Ingres)의 <성체와 함께 있는 마리아 Virgin with the Host>(1854)와 동일한 구성을 가지며, 그녀의 포즈는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 (Marcantonio Raimondi)의 판화들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성모마리아의 포즈를 재현한다. 그와 반대로, 거울 속의 쉬종은 검은색 정장을 입고 모자를 쓴 남성 앞에서 구부정하게 서있으며, 이는 그 시대에 만연했던 매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쉬종은 처녀와 매춘부라는 양극을 모두 상징한다. 이와 같이, 이원적인 전통성과 근대성, 그리고 처녀와 매춘부가 하나의 작품 안에 공존함으로써, 마네의 <폴리-베르제르의 바>는 하나의 해석으로 환원될 수 없는 미스테리한 작품이 되었다.
본 논문은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 1955- )의 ≪프로젝션을 위한 드로잉 Drawings for Projection≫ 연작 (1989-2003)에 관한 연구이다.
켄트리지가 태어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과거에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는 극단적인 인종차별정책을 시행했던 나라로, 켄트리지의 작업의 주제에는 이로 인한 인한 트라우마가 각인되어 있다. 트라우마는 반복강박을 수반하고, 이러한 반복강박은 현대 예술가들에게 있어서는 아카이브(archive)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켄트리지 역시 자신의 ≪프로젝션을 위한 드로잉≫ 연작에서 아파르트헤이트라는 트라우마를 팰림프세스트라는 표현 방식을 빌어 ‘아카이브 열병’으로 표현하였다. 켄트리지는 자신의 연작인 ≪프 로젝션을 위한 드로잉≫에서 여러 겹의 흔적들이 쌓여 이루어진 팰림프세스트를 통해 과거의 기억들이 중첩된 장면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중첩은 기억과 망각 사이에 놓여 있는 여전히 현재형인 작업으로, 이는 우리가 어떻게 트라우마를 기억해야 하는지를 제시해주고 있다.
또한 켄트리지의 ≪프로젝션을 위한 드로잉≫ 연작에 나타나는 주된 기법인 팰림프세스트는 이전의 흔적들을 오버래핑(overlapping)시키며 기억을 가시화한다. 그렇기에 그 작업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속하지 않으며, 동시에 과거에도 현재에도 속하게 된다. 이는 공간적 몽타주(spatial montage)의 속성으로, 공간적 몽타주는 하나의 시공간 안에 존재론적으로 조화 불가능한 것을 공존하게 하는 것이다. 과거의 흔적들을 간직하고 있 는 켄트리지의 팰림프세스트는 각기 다른 형태들의 공존을 허락하고 과거와 현재의 공존처럼 존재론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장면들을 결합시킨다. 켄트리지는 존재론적으로 불가능하고 하나의 주제에 대해 각기 다른 관점을 유지하는 공간적 몽타주를 통해 과거의 역사로 편입되는 완결된 내러티브로서의 트라우마가 아닌 지금 이 순간의 트라우마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팰림프세스트라는 매체 표현 방식을 통하여 아카이브 열병과 함께 공간적 몽타주를 보여주고 있는 켄트리지의 ≪프로젝션을 위한 드로잉≫ 연작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라는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This thesis is a study on dualism in Cy Twombly(1928-2011)’s series of Lepanto. Twombly made his debut with his scribble-like works in the 1950s when Abstract Expressionism enjoyed its golden age. In the New York art world where American Type Modernism was prevalent, Twombly was not permitted, and thus he had been a forgotten artist for a long time. After the advent of postmodernism, however, Twombly has been “rediscovered” continuously and become one of the most expensive artists. Hostility and hospitality, between these, does Twombly’s dualism exist. The subject of the series of Lepanto, the Battle of Lepanto, was the naval battle in which a fleet of the Holy League, a coalition of Spain, the Republic of Venice and the Papacy, decisively defeated the main fleet of the Ottoman Empire in 1571. Because the pivotal point of power between the East and the West had changed due to this event, the Battle of Lepanto has been considered as the crucial turning point of conflicts between the East and the West. Traditionally many Western artists have painted the Battle of Lepanto as a grand painting showing off the glorious triumph. However, it is the scrawl-like traces that Twombly’s series of Lepanto displays. Therefore, it can be said that not as representing the monumental event as it is, but as doodling it lightly, Twombly intended to break down the traditional binarism ― the East and the West, by extension, triumph and defeat, life and death. In the series of Lepanto, the galleys signify masculinity and the sea implies femininity according to Roman Jakobson’s rule of metaphor and metonymy. The masculinity and the femininity in Twombly’s series of Lepanto have a horizontal characteristic, different from Abstract Expressionism’s vertical dualism. Twombly’s series of Lepanto is included in the genre of a war painting, and like other war paintings, there are a large number of death in the series of Lepanto. Despite such a serious subject, however, sensuality exists in Twombly’s series of Lepanto. It is ascribed that extreme pain comes down to sensuality of death in the end. Life is a detour on the road to death and death is a process for life. pain and pleasure are one and the same. As a consequence, it can be deemed that the dualism in Twombly’s series of Lepanto is not for the confrontation, but for the union of opposi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