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 피에타>는 성모가 죽은 그리스도를 무릎에 안고 있는 전형적인 피에타와는 다른 구도를 지니고 있다. <론다니니 피에타>에서 성모와 그리스도는 수직으로 서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부축하고 기대어있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또한 이 전 과정에서 남은 것으로 보이는 팔 형태와 사람의 얼굴, 그리고 세마포와 도유석으로 추측되는 파편적인 형태들이 남아있다. 이와 같은 <론다니니 피에타>의 독특한 구도와 파편적인 흔적들은 이 조각을 피에타 외에 십자가 책형이나, 매장 등의 다른 도상으로 해석할 여지를 준다. 그리고 그러한 여러 도상들에 기반하여 그리스도 뒤편의 인물이 성모가 아닌 다른 인물이었을 가능성을 논의해볼 수 있다. 이 인물의 신체적인 비율과 맨 다리를 드러낸 표현은 그가 여성이 아닌 남성이었을 것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바사리와 콘디비는 그가 니고데모이자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이었을 가능성을 제안한다. 당시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은 미켈란젤로가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사이에서 갈등하였음을 고려할 때 그와 같은 해석은 가능해 보인다. 즉, 미켈란젤로는 밤에 비밀스럽게 그리스도를 찾아간 유대인 니고데모와도 같은 처지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미켈란젤로의 의도는 <론다니니 피에타>를 여러 차례 수정하면서 결국에는 모호하게 남아있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론다니니 피에타>를 통해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조각에 이상을 끊임 없이 추구했으며, 이러한 그의 노력은 여러 흔적을 지닌 미완의 대리석 그대로 남아있다. <론다니니 피에타>는 조각가로서의 미켈란젤로와 대리석 사이의 치열한 조각적 과정 그 자체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본 논문은 사전트가 제작한 남성 초상화를 생물학적 남성의 지위나 가치보다 남성들이 처한 사회적 환경의 변화 속에서 남성성의 가치를 살핀 연구이다. 사전트는 19세기에서 20세기 초 프랑스, 영국, 미국의 저명한 귀족, 학자, 정치인 등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이들의 초상을 제작함으로써 19세기 후반 유럽과 미국의 남성성을 확립했다. 사전트의 남성 초상화는 일견 계급과 젠더라는 측면에서 우월한 귀족 계급의 남성 위치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듯 보이나, 사실은 귀족 계급이 붕괴되기 전으로 회귀하려는 노스탤 지어적 성격을 띤다. 그는 급격히 성장한 부르주아지 계층들이 구 귀족 세대를 따라하려는 욕구를 초상화에 반영했다. 사전트는 당시의 댄디라는 개념을 적용해 초상화를 제작했으며, 이는 부르주아지 뿐 아니라 상류사회의 기호에도 맞는 방식이었다. 19세기 프랑스 사회 문맥에서 댄디란 신체의 외모, 세련된 언어 구사, 여유로운 여가 등에 특별히 의의를 부여하는 사람을 이른다. 사전트는 19세기 말 벌어진 커다란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정치적 변화를 목격했다. 동시대 남성들에게 산업화에서 제국주의에 이르는 커다란 변화는 사회적 불안을 야기했으며, 제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곧 새로운 남성상을 요구하게 되었다. 19세기말 ‘남성성(Maleness, Masculinity, Manliness)’이란 용어는 특별한 함의와 의미를 가지고 있다. Manliness’는 용감하거나 강하다는 전통적으로 남성의 특질을 말한 다. 반면에 ‘Masculinity’와 ‘Manliness’는 사회적으로 구축된 남성상의 형식을 지시하는 표현이다. 이 두 개념은 특별히 19세기말의 남성 연구와 관련 있으며, 사회적으로 요구 되는 남성상의 개념이다. 이러한 남성상의 패러다임에 포함할 수 있는 개념은 젠틀맨, 댄디, 비지니스맨과 같은 사회적 남성상의 개념이다. 따라서 사전트의 초기 남성 초상화의 남성성의 개념은 생물학적 개념보다는 사회적 개념인 남성상의 개념과 관련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도 사전트의 남성 초상화의 남성성의 개념을 생물학적인 층위에서 보다는 남성상이라는 사회적 측면에서 고찰했다. 그 결과 사전트는 시터와 화가와의 전통적 관계에서 교감하거나 소통 혹은 더 나아가 그들의 삶을 관찰하며 시대적 변화를 담아내는 사회적 초상을 제시했다.
본 논문은 페르디난트 호들러(Ferdinand Hodler, 1853-1918)의 <선택받은 자 The Consecrated One>(1893)에 관한 연구이다. 호들러는 죽음의 경험으로 형성된 인간의 보편적인 운명에 대한 철학을 바탕으로 작가의 내면을 표현하였다. 호들러의 초기작은 비관적 종말론으로 보편적 운명인 죽음을 두려워하고 고뇌하는 인물상을 그렸다. 그러나 호들러는 1892년에 뒤팽과 아들 헥토르와의 재결합으로 안정을 찾게 되어, 삶과 죽음이라는 생의 이중적 구조와 보편적인 주제를 낙관적인 시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다. <선택받은 자>는 이시기의 과도기적 작품으로 다수의 인물이 등장하는 기념비적 회화이다. 호들러는 <선택받은 자>에서 여성 이미지들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란히 배열하였고, 소년과 작은 정원을 화면의 정중앙에 배치하여 평행주의를 적용하였다. 평행주의란 호들러의 작품 전반에 나타나는 조형언어로 화면의 구성방식을 의미하는 형식적인 측면 뿐 아니라, 호들러가 평생 동안 추구한 보편적 가치인 내용적인 부분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호들러의 평행주의는 자연을 관찰하면서 그 거대한 운행과 모습이 형성하는 통일감을 바탕으로 정립되기 시작하였다. 호들러가 평행주의에 대한 개념 정립이 자연의 질서와 통일감에서 시작됐다면 이론적 근거는 샤를르 블랑(Charles Blanc, 1813-1882)의 조형예술의 문법 Grammaire des Arts du Dessin(1867)의 영향이었다. 블랑의 저서에 서는 종교적 신성함을 부여하기 위하여 이집트 미술의 반복 대칭을 강조하였으며, 호들러는 이러한 특징을 <선택받은 자>에서 활용하였다. <선택받은 자>는 이러한 형식적 특징과 함께, 기도하는 나체의 소년과 천사들 그리고 추상화된 배경으로 신비롭고 신성한 종교적 분위기와 상징성이 풍부한 작품이다. <선택받은 자>의 주제는 ‘봄의 도래를 알리는 전령’과 ‘구원을 의미하는 기독교적 도상’ 으로 분석된다. 첫 번째 주제는 범신론에 근거한 자연숭배사상으로 봄의 부활과 재생, 젊음의 생명력에 대한 경의를 표현하였다. 호들러의 종교는 프로테스탄트교였지만 1892 년 장미십자회 전시와 19세기 말 여러 가지 신비주의에 관심을 가지면서 범신론적인 주 제를 표현하였다. 두 번째 주제는 아들 헥토르와 천사들을 통해 드러나는 기독교적 구원의 개념이다. 호들러는 유년시절 가족들의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을 극복하기 위해, 칼뱅의 선민사상을 기반으로 아들의 구원을 기원하고 있다. 그리고 호들러는 묘목과 소년과 천사의 도상을 통해 십자가 책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호들러는 <선택받은 자> 에서 아들의 구원뿐 아니라, 십자가 책형으로 인간의 원죄를 대속한 예수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여, 인류의 구원을 기원하는 보편적 인류애를 반영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호들러는 이 작품에서 천사를 성모마리아로, 소년을 어린 예수로도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여 가톨릭교에 대한 관심도 배제하지 않았다. 호들러는 <선택받은 자>에서 평생 동안 천착했던 종교성과 보편성을 개인적인 가치를 초월하여 성공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선택받은 자> 단 하나의 작품으로 작가의 인생관과 예술관을 포괄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본 논문은 이탈리아 태생의 미국화가 조셉 스텔라의 1910-1920년대 작품에 나타난 종교성에 대한 연구이다. 스텔라는 뉴욕의 도시풍경을 묘사한 대표작 <빛의 전쟁, 코니 아일랜드, 마디 그라 Battle of Lights, Coney Island, Mardi Gras>(1913-1914)와 <해석 된 뉴욕 도시의 음성 The Voice of the City of New York Interpreted>(1920-1922) 등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미래주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스텔라는 산업도시 이외에도 여성 누드, 마돈나, 식물 등 다양한 주제와 양식으로 풍성한 다작을 남겼다. 그러나 대부분의 스텔라 작품 연구는 미래주의 시각에서 아주 짤막하게 소개되었고, 간혹 정밀주의에서 스텔라의 이름이 언급되지만 그 관계는 매우 미미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스텔라의 작품 속에 내포된 의미에 접근해야할 것인가. 스텔라는 1896년에 도미(渡美)하면서 대도시 뉴욕의 모습에 압도되었다. 그는 산업적 풍광에서 심미적이고 위대한 아름다움을 느꼈으나, 이내 건물에 가려진 햇빛과 주변의 노동자와 이민자들의 현실은 망향(望鄕)이 깊어지고 내면적 감정을 작품에 투영하게 했다. 스텔라가 간직한 고향 풍광은 교회종탑이 있었고 이는 그리움과 종교적 근원처럼 그의 무의식을 지배했다. 따라서 스텔라는 대도시 뉴욕의 수직적 공간에서 발생한 양가 적 감정을 천상과 소통하려고 하는데 유연한 접근이 가능했다. 스텔라는 브루클린 다리를 본 순간, 다리의 본질적 기능인 통로를 떠올림과 동시에 과거의 대성당이 그 시대의 상징물이었던 것처럼 현대 기계시대의 상징물로 보았다. 그는 브루클린 다리를 배경 속의 부수적인 역할로 등장시킨 당대 예술가들과 달리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통로로 사용하여 감상자를 신성의 면전에 세울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종교미술에 내포된 신성함과 경건함 등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었다. 이러한 스텔라의 노력은 전형적인 현대 도시, 뉴욕 자체를 묘사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스텔라는 거대한 크기의 <해석된 뉴욕 도시의 음성>에서 종교 제단화 구조의 서사적 구성으로 맨해튼을 상징하는 장소들을 가시화하고 유랑하는 듯이 정신적 체험을 유도할 수 있었다. 1910-1920년대 스텔라의 대표작 속에서 종교성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가톨릭 문화권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스텔라에게 내재되어 있는 가톨릭 유산이 나타난 것이자 점진적으로 정신적 통합을 고취시킨 것이다. 스텔라는 기계문명을 찬미하는 세속적 주제와 종교성을 결합하여 캔버스를 정신적 감동으로 승화시켰고, 이것은 모더니즘 양식에 기초하면서도 정신적 가치를 시각적으로 구현하여 표현하는데 적합하게 작용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스텔라의 1910-1920년대 뉴욕 이미지를 통해 종교성이 내포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 연구는 스텔라의 작품에 대한 기존 연구가 미흡한 것을 고려할 때 대표 작품을 종교성이라는 주제에서 재조명하고 스텔라 연구의 영역을 확장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본 논문은 아키발트 모틀리(Archibald J. Motley Jr, 1891-1981)의 흑인 여성 초상화 연작에 나타난 ‘신 흑인’ 도상을 통해 탈식민주의적 성격을 밝히는 연구이다. 모틀리는 동시대 ‘신 흑인’의 모습을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구현하며, 할렘 르네상스시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모틀리의 명성과 달리 국내에서 그에 관해 이루어진 연구는 미비한 실정이다. 따라서 모틀리의 전반적인 작업경향의 시작되는 흑인 여성 초상화 연작을 연구하는 것은 모틀리에 작업 전반에 대한 이해를 제공할 수 있다. 모틀리의 흑인 여성 초상화 연작은 획일적인 흑인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다양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도상을 연구하는 작업임을 발견할 수 있다. 모틀리는 미국 사회의 인종개념에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 진실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이미지를 알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기 때문에 흑인 인종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신체적, 문화적, 경제적 조건을 가진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모습을 포착하는데 주목했다. 또한 다양한 피부색과 개성 을 가진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모습은 정형화된 흑인의 모습을 전복시킬 뿐만 아니라 인 종차별에 관한 관념 및 사고들에 관해 재해석을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모틀리의 흑인 여성 초상화 연작은 인종구분이 사회적 환경에 따라 유동적일 수 있다는 담론을 시사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모틀리의 흑인 여성 초상화 연작은 인종구분에 대항 하는 탈식민주의적 성격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본 연구는 이탈리아 예술운동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의 일원으로 활동하여 주목을 받았던 조반니 안셀모(Giovanni Anselmo, 1934- )의 초기 작업에 대한 연구이다. 제르마노 첼란트가 주도했던 ‘아르테 포베라’는 ‘미래주의’를 제외하고는 전후 아방가르드 미술사에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던 이탈리아가 르네상스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 온 예술 종주국으로서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미국 및 다른 유럽 국가들의 개념미술 운동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도록 이탈리아의 예술운동을 범주화하는 과정에서, 첼란트를 포함한 많은 학자들이 이 운동에 대한 정의를 여러 차례 번복하면서 ‘아르테 포베라’의 특징은 포괄적이고 모호해진 측면이 있다. 결과적으로 이 운동의 정의는 가난한 오브제, 자연적인 형태, 활동적인 힘, 재료적 리얼리티 등으로 귀결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안셀모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안셀모는 첫 번째 전시만을 제외하고 모든 ‘아르테 포베라’ 전시에 참여하였으며, 첼란트가 정의한 이 운동의 특징을 작업에서 효과적으로 표현했으며, 그가 원했던 넓은 범주의 동시대 작가들을 포용할 수 있는 주제를 선택하였다. 안셀모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에너지’는 열려 있는 상태로 존재하며, 모든 고정된 것들과 유동적인 것들의 경계를 허무는 방식으로 작업에 표현된다. 또한 물의 증발이나 열에 따른 금속의 긴축 상태, 직접적인 유기물을 재료로 한 작업들은 자연력과 생명력을 중시하는 아르테 포베라의 강령에 부합한다. 또한 멈춰있지 않고 흐르는 에너지는 소모와 소비의 전략으로 연결된다. 안셀모의 이러한 작업들은 ‘아르테 포베라’의 정착 초기에 그 운동을 효과적으로 대변하였을 뿐만 아니라, 움베르토 에코의 ‘열린 작업’,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의 증가’, 조르주 바타유의 ‘데팡스’ 등의 담론과 연결되어 동시대적 연구의 동의를 이끌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