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팝아트는 1960년대 후반 프랑코 시대의 경제 성장과 소비문화 확산이라 는 사회적 변화 속에서 등장했다. 표면적으로는 근대화와 물질적 진보가 이루어지는 듯 보였지만, 정치적 억압과 검열, 사회적 불평등은 여전히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순적 현실 속에서 스페인 팝아트는 대중적 이미지와 광고, 만화 등 친숙한 시각 언어를 활용하여 사회와 권력 구조를 비판하는 독특한 표현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화려하고 소비지향적인 이미지들은 적극적으로 차용하면서도 단순히 미국 팝/아트를 따라 하지 않고, 풍자와 반복, 재구성을 통해 프랑코 정권과 소비사회의 이면을 날카 롭게 드러냈다. 스페인 팝아트는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모순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동시에, 자국 현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독자적 예술적 시도를 보여주었다.
본 논문은 브라이스 마던(Brice Marden, 1938-2023)의 <한산 Cold Mountain> (1989-1991) 연작에 나타난 동양 사상과 서예적 조형성에 대한 연구이다. 마던은 작업 초기에 단색화 양식으로 미술계에서 주목받았으며, 절제된 색채와 독특한 표면 처리를 통해 독창적인 추상 회화의 세계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아시 아 예술과 철학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서예의 형식과 사유를 자신의 작품에 흡수 하며 새로운 예술을 모색 하였다. <한산> 연작은 이러한 변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서 동양의 서예적 요소와 서양 추상미술 기법을 결합한 독창적인 작품이다. <한산> 연작은 마던이 중국 당(唐)나라의 시인 한산(寒山, 약 8세기)의 시와 철학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여섯 점의 대형 회화 작품이다. 마던은 <한산> 연작에서 동양 철학 전통을 바탕으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 로운 관계를 탐구하며, 이를 작품 속에 담아내고자 했다. 마던은 한산의 시에서 느껴지는 명상적 태도와 깨달음의 과정을 화면에 구현하였고, 동양 서예에서 차용한 선(線)과 형식을 통해 시적 사유를 시각적으로 전환하였다. 그는 서예의 필획 순서와 공간 구성을 기반으로 작업을 전개하면서 화면에 여백을 활용하여 정신적 깊이와 조화로운 공간감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자연에서 얻은 형태를 바탕으로 글리프(glyph)라는 독창적인 시각적 표현 방식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 형상은 작업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중첩되고 재구성되며 점차 복잡한 구조로 발전 하였다. 마던은 팔림프세스트(palimpsest) 기법을 활용하여 글리프와 색채를 캔버스 에 여러 번 중첩시키며 작업 과정의 흔적을 화면에 남기고 작품에 깊이를 더했다. <한산> 연작은 마던의 ‘평면 이미지(plane image)’ 개념을 반영한 작품이다. 이를 통해 그는 회화의 평면성을 물리적 한계를 넘어 정신적 깊이로 확장하며, 관람자가 명상적이고 내면적인 성찰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러한 작업은 동양 철학과 불교 선(禪)사상의 영향을 바탕으로 각기 다른 방식으로 깨달음과 내면적 여정을 표현하려는 그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 특히, 마던은 <한산> 연작에서 동양 예술에 대한 깊은 존중과 이해를 바탕으로 서양의 추상미술 기법과 동양의 철학 및 서예 요소를 결합하여 현대미술의 새로운 표현 방식을 찾아갔다. 이를 통해 마던의 작업이 동서양 예술의 경계를 넘어서 독창 적인 예술적 성과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본 논문은 오딜롱 르동(Odilon Redon, 1840-1916)의 오르페우스 연작에 대한 연구이다. 르동의 오르페우스 연작은 총 열 세 작품으로 흑백 시기의 다섯 작품, 색 채 시기의 여덟 작품으로 구성된다. 오르페우스 연작은 오르페우스의 신화적 요소와 르동의 상징주의 화풍을 바탕으로 음악적 추상성과 신비적 사상을 특징으로 하며 예 술의 융합적 사상을 논하는데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르동이 활동했던 상징 주의 시기는 보불 전쟁의 패배 이후 불안정한 현실과 세상에 대한 비극적 관점이 만 연했던 때이다. 이러한 관념은 예술가들에게 영혼의 신비성, 몽상적이고 도취적인 독 창적 상상력에 대한 예술적 개념을 제시했다. 또한 르동을 포함한 많은 화가들은 바 그너, 쇼펜하우어, 니체 등에 의해 음악의 영혼성에 대한 관념에 많은 영향을 받았 다. 이와 같은 관념은 공감각적 회화가 체계화되는데 기반을 마련해주었으며 르동이 오르페우스 연작을 제작하는 데 큰 기틀이 된다. 르동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음악을 통한 추상적 조형성과 융합적 사상은 르동의 생애와 예술 변천과 많은 연관성을 지 니고 있다. 즉, 어린 시절 성장 과정에서의 경험,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 습득한 낭만 주의적 상상력과 실증주의와 과학, 무의식에 대한 신비주의 사상이 모두 반영되어 있 음을 의미한다. 음악은 르동의 예술 작품에 매우 중요한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예술 적 가치를 제공했으며 이것은 오르페우스 신화에서 오르페우스가 가지고 있는 상징 성과도 일치한다. 오르페우스 연작에서 나타나는 추상적 조형성은 음악의 이성과 감 정의 이원적 요소를 포괄하고 있으며 르동은 이와 같은 음악의 특징을 통해 회화의 음악적 추상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이것은 음악을 통한 암시적 회화를 말하며 르동 은 이를 통해 예술 작품이 모방적 역할에서 벗어나 형식이나 상징의 추상적인 힘을 연구하는 데 기틀을 마련했다.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가 정의했던 ‘음악’의 정의 는 오르페우스의 리라와 많은 연계점을 가지고 있으며 르동은 피타고라스와 리라의 개념을 자신의 작품에 도입한다. 이것은 르동이 리라의 기하학적 특징을 통해 회화를 음악적 추상과 연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르동은 오르페우스 연작에서 다양한 색채를 통해 관람객에게 음악적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회화에서 나타나는 음악적 감정은 음악적 순수성을 의미하며 이것은 르동이 자신의 예술에서 가장 중시했던 ‘암시성’으로 귀결된다. 자신의 회화는 ‘음악’처럼 정 의내릴 수 없는 예술적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비 경계성, 초월성을 의미한다. 신화 속 오르페우스가 죽음 이후에도 계속 노래와 연주를 하며 하늘의 별자리로 변 형되어 죽음과 삶의 초월성, 일원성을 상징했듯이, 르동 역시 육체적, 정신적 죽음을 신비적 영혼, 초월적 정신으로 승화시켜 예술로 구현하였다. 오르페우스 연작에서 나 타나는 오르페우스의 머리와 표정은 사후 세계에 대한 초월적 인식과 신비성을 보여 주고 있으며 육신은 파괴되었으나 자연과 합일하여 ‘변형’의 형태를 통해 해방자로 그려내어 오르페우스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011년 7월 7일 옛 전남도청 앞 분수대에서 흑표범(장맑은)은 퍼포먼스 <정오의 목욕>을 선보이며, 사전 설명 없이 과녁이 그려진 자신의 신체를 침묵 속에서 씻는 행위를 10분간 지속함으로써 일상적 행위를 역사적 공공장소에 중첩시켰다. 도로 소 음과 셔터음, 물소리만이 남는 이 수행은 언어적 서사를 배제한 채 장소의 기억을 직 접 호출한다. 퍼포먼스가 이루어진 분수대와 옛 전남도청 일대는 5·18광주민주화운 동의 핵심 현장으로, 1980년 5월 신군부가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효해 정치 활동 과 집회를 전면 금지하고 영장 없는 체포·구금을 예고하며 국가 폭력을 극단적으로 행사했던 공간이다. 광주에서의 무력 진압은 시위에 참여한 시민과 학생들에게 대규 모 희생을 초래했고, 그 결과 5·18은 개인적 트라우마를 넘어 집단적·문화적 트라우 마로 각인되었다. 이러한 기억은 세대를 넘어 포스트메모리로 전승되며 문학, 다큐멘 터리, 미술 등 다양한 예술적 재현을 낳았으나, 다수의 작품은 비극성과 희생자 중심 서사에 머물러 왔다. 이에 비해 흑표범의 <정오의 목욕>은 말없는 ‘목욕’이라는 행위 를 통해 애도와 비통의 재현을 넘어 치유와 순환, 그리고 죽음을 ‘기르는’ 제례적 차 원의 기억 실천을 제시한다. 이는 사건을 단순히 재현하거나 고발하는 대신, 역사적 폭력이 남긴 흔적을 현재의 몸과 행위로 다시 호명하는 수행적 기억으로 이해될 수 있다. 본 논문은 이러한 관점에서 포스트메모리 세대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루 는 방식과 의미를 검토하고, <정오의 목욕>을 통해 우리가 이 사건을 어떻게 현재화 하고 사유할 수 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기존 흑표범 연구가 주로 세월호 참사를 다룬 <VEGA>(2015–2016)에 집중되어 온 점을 고려할 때, 과거의 진혼과 현재의 미 해결 진실을 병치하는 작가의 작업 연속성 속에서 <정오의 목욕>을 분석하는 것은 이후 그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이론적 단서를 제공한다.
김홍도(金弘道, 1745-1806년 이후)를 모르는 한국인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 같다. 특히 그의 《단원풍속화첩(檀園風俗畵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 ‘서당,’ ‘씨름’ 장 면은 널리 알려져 조선 후기 최고의 풍속화가로 김홍도는 인식되어 왔다. 김홍도는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도화서(圖畫署) 화원이었다. 정조는 화원들 중 김홍도를 가장 아꼈으며 궁중회화 제작과 관련된 모든 일을 그에게 맡겼다. 김홍도는 정조의 재위 기간 동안 국중(國中) 최고의 화가이자 ‘왕의 화가’로 활동했다. 김홍도의 명성은 당시 최고였으며 그는 많은 그림 주문을 받아 경제적으로 도 풍족했다. 김홍도의 화려했던 시절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왔지만, 그가 말년에 병고와 빈곤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간과되어 왔다. 그의 말년에 일어난 결정적인 사건은 1800년 6월 28일에 정조가 사망한 일이다. 자신을 무한히 신뢰하고 후원해 주었던 정조의 죽음은 김홍도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후 1804년 5월 5일에 김홍도는 자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으로 차출되었다. 김홍도는 그때까지 자비대령화원으로 활동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정조가 죽고 누구도 후원해 주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그는 자비대령화원으로 어쩔 수 없이 일해야 했으며 1년에 4번 녹취재(祿取才)라는 인사고과 시험을 치러야 했다. 당시 60세였던 그는 나이 어린 도화서 화원들과 녹취재 시험에서 녹봉을 다투기 위해 경쟁해야 했다. 이것은 그에게 큰 정신적 고통이 되었던 것 같다. 1805년 8월 말경에 김홍도는 도화서를 떠났으며 이후 중병(重病)에 걸려 생사를 오갔다. 아울러 그는 돈이 없어 의식주를 해결하기도 어려웠다. 그가 말년에 그린 그림들 중에는 영락(零落)한 자신의 상황을 반영한 ‘자화상적 이미지(self-image)’ 로 판단되는 회화작품들이 몇 점 남아있다. <추성부도(秋聲賦圖)>(1805년, 국립 중앙박물관 소장), <염불서승도(念佛西昇圖)>(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작도(鵲圖)>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는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한 김홍도가 자신의 심정을 드러낸 그림들이다. 1805년 말에 김홍도는 취식(取食), 즉 밥을 얻어먹기 위해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로 내려갔으며 얼마 후 그곳에서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국중 최고의 화 가였던 그의 죽음은 너무도 쓸쓸하고 허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