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수토제도는 안용복사건으로 1694년 시작되어 1894년 12월 종료될 때까지 201년간 조선 중앙정부의 깊은 관심 속에서 지속적으로 수행되어왔다. 본 논문은 수토의 주기성을 파악하기 위해 사료, 수토기, 각석문, 울릉도도형, 대 풍헌자료, 문집 등을 검토하여 숙종 때부터 영조 때까지 울릉도 수토가 이루어진 해와 횟수를 파악해 보았다. 숙종 때는 7회(1차~7차)의 울릉도 수토가 있었고, 1697~8년, 1708~10년, 1717~8년 등 7회의 수토정지가 있었으며, 삼척영장의 수토까지 3년 1차 윤회수 토가 이루어졌다. 경종 때는 한 차례의 수토(8차)가 있었다. 영조 때는 1745년 월 송만호 박후기의 수토(14차)까지는 3년 1차 윤회수토가 시행되었고, 1747년 삼척 영장의 수토부터는 2년 1차 윤회수토가 시행되었다. 영조 1년부터 21년까지 3년 1차 윤회수토 6회(9차~14차), 수토정지 5회가 있었고, 영조 23년부터 50년까지는 2년 1차 윤회수토 14회(15차~27차), 수토정지 3회가 있었다. 숙종 20년부터 영조 50년까지 27차에 걸쳐 울릉도 수토가 실시되었다. 이러한 지속적인 울릉도 수토제도의 운영은 1,500년 이상 울릉도와 독도를 생활 공간으로 살아온 우리나라 연안주민들의 생활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울릉도 수토제도는 독도에 우리나라의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 영유권을 증명하는 핵심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201년간 수토의 전모를 밝히기 위해서는 정조 즉위년부터 고종 31년(1894년)까지의 분석이 더 필요하다.
조선 명종 10년(1555년)에 축성된 월송포 진성은 1970년대까지도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있었다고 전해지지만, 1970년대 이후 주변에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면서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지고 흔적만 일부 남아있는 상태였다. 월송포 진성의 남쪽 일부가 울진군에서 추진하는 망양-직산간 도로 확장공사 부지에 포함됨으로 인하여 추진된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성벽과 문지, 우물 등이 잘 남아있음이 확인되었다. 진성은 해안에 접한 해안평탄면에 형성된 사구의 남쪽 말단부에 구축되어 있으며, 성의 남쪽으로 수로가 연결되어있어 천연의 해자를 이루는 형태이다. 이는 인접한 울진포영 및 남해안 일대에 위치하는 영ㆍ진ㆍ보성의 입지와도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성벽은 후대 교란으로 인하여 동쪽 일부가 유실되었으나 지적도상의 지번경계와 거의 일치한다. 지적도를 참고하여 성의 규모를 추정해 보면 둘레 328.8m 정도이다. 성벽의 둘레와 문헌기록을 통하여 확인되는 성벽의 높이는 3.1~4.7m 정도로 추정되며,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성벽의 폭은 6m 내외이다. 성벽의 안쪽 에는 성벽과 동시에 축조된 우물이 잘 남아있었으며, 문지 안쪽으로 다량의 기와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 풍경화에서 보이는 문루에서 흘러내린 것으로 판단된다. 월송포 진성은 인접한 대풍헌의 현판과 『조선왕조실록』등을 통하여 삼척영과 함께 3년에 한 번씩 번갈아가며 울릉도 ․ 독도 수토를 담당하였던 곳임을 확인하였다. 울릉도 수토는 1693년 안용복의 일본 도해 사건을 계기로 1694년 처음 시작되어 1895년까지 계속되었다. 수토사의 출발지는 삼척영장과 월송만호가 번갈아 수토관으로 파견되는 관계로 초기에는 삼척부의 장오리진, 울진현의 죽변진, 평해 군의 구산포 등 수토관의 위치와 인접한 지역이었으나, 후기로 오면서 구산포로 고정되었다. 이는 동해의 항로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면서 울릉도과 가장 가깝고, 항해에 해류와 해풍을 이용할 수 있는 곳이 구산포임을 파악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