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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백제의 위덕왕(昌王)은 선왕인 성왕(聖王)의 무덤과 함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을 조성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능산리사원은 능이 조성된 뒤 창사(創寺)가 시작되어 사리가 공양되던 위덕왕 13년경(567) 거의 완공단계에 이르렀는데, 수도 사비[부여]의 최후 방어성인 나성(羅城)과 가장 가까운 곳에 왕실의 능묘가 조성되고 나성과 묘역 사이에 왕실의 선조를 위령하는 절 및 부속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능의 관리와 각종 상장의례는 물론 불교행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백제에서는 중국의 남북조에 빈번히 사신을 파견하였다. 위덕왕은 중국 남조로 편중되던 기존의 대중국관계에서 벗어나 북조국가들과도 교류를 하였다. 백제에서는 점복에 대한 관심이 커서 중국의 송나라로부터 식점(式占)을 요청하여 받아들였다. 이러한 중국의 식점을 통해 백제에서는 길례 즉, 혼인과 흉례 즉, 상장(喪葬)의 날짜를 잡기도 했을 것이다.불교가 전래된 이후 백제에서는 사찰․탑의 건립과 조상(造像) 등의 신앙행위, 즉 공덕 행위가 매우 중시되었다. 특히 웅진시대 이후 백제에서는 중국 사서에 ‘승려(僧尼)․절(寺)․탑(塔)이 매우 많다고 기술될 만큼 사회 전반에 걸쳐 불교에 대한 신앙이 매우 컸다. 불교 사찰 내에는 불상과 함께 반드시 탑이 세워지게 마련인데 여기에 부처의 사리를 안치함으로써 탑은 일종의 분묘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백제에서는 이러한 사리봉안이 매우 중요한 불교의식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백제의 역법과 관련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백제본기의 일식(日食) 천문(天文)과 관련한 기록에 의해 간지역일(干支曆日)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전하는 관련 기사를 통해 백제에서는 역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관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에서는 송의 원가력(元嘉曆)을 사용하였는데 백제에서 사용한 원가력은 비유왕(毗有王)이 재위 24년째인 원가 27년(450)에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식점 등을 구한 사실을 통해서 이무렵에 들여온 것으로 보인다.목성을 세성(歲星)이라고도 하며 태음(太陰)․세음(歲陰)․청룡(靑龍)․천일(天一)․섭제(攝提) 등 다양한 이름으로도 불린 태세는 춘추전국시대부터 매년 홍수(水災)나 가뭄, 농업의 풍흉 등을 점치는 점성술에 이용되었다. 태세는 12지간을 담당하는 천신이 되었고 태세의 방위에 따라 행사의 길흉이 결정되었는데 매 4개월마다 자(子)․유(酉)․오(午)․묘(卯)의 방위를 따라 운행하였다. ��논형(論衡)��난시(譋時)편에는 거주나 이사․여행․제사․상장․혼인 등에 있어서 태세를 주의해야 한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그런데 백제의 창왕명석조사리감 명문에 의하면 매형공주가 불사리를 공양한 시점은 바로 위덕왕이 재위한 지 13년이 되는 태세의 정해(丁亥)다. 따라서 백제왕실에서는 중국에서 수입한 역법과 식점 등에 의거하여 위덕왕 13년이 되는 태세에 흉신인 세월(歲月)을 피해 정해에 능산리사지에서 사리공양 등의 불교식 제사를 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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