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한국전쟁 직후에 식민지 세대 화가ㆍ평론가들이 제기한 추상 담론이 한국근현대 미술사에서 어떤 의미와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재검토하는 작업의 일부이다. 추상 담론은 식민지 유산인 《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 중심으로 미술계가 재편된 가운데 제기되었다. 그들은 한국전쟁 후 폐허 같은 상황에서 이른바 세계화ㆍ현대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설정하고, 서구의 전후 추상 물결을 현대성으로 인식하는 한편, 실존주의 사상과 문학에 공감하는 가운데 추상 담론을 전개했다. 그들은 주로 1930년대 초부터 1940년대 전반기의 동양주의 추상 담론을 재인식하는 가운데 추상을 통하여 동양적/한국적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들과 뒤이은 전후 세대가 냉전공간에 현대성을 지시하는 기호로서 추상을 신화화하는 동안, 식민지 근대성을 해체하는 또 다른 시대적 과제는 묻히게 되었다.
본고는 향후 한문 교육과 관련하여 수행될 역량 관련 연구의 초석을 다지는 차원에서 교육과정에 핵심역량이 도입되게 된 배경과 취지를 살펴보고, 한문과 교육과정에 제시된 핵심역량 다시 말해 교과역량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검토 결과 ‘역량’이라는 개념이 1970년대 초 처음 제기된 이래, 자 유교육의 전통에 기반을 둔 학교교육이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고자 전 지구적으로 역량을 학교교육 의 중심에 두고 사회적 삶에서 필요한 역량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교육내용을 수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그간 축적된 핵심역량에 대한 연구 성과가 모여 2015 개정 교육과정에 핵심역량이란 개념이 등장하였는데, 이 핵심역량은 ‘추구하는 인간상’ 및 ‘학 교급별 교육목표’ 등 교육과정을 구성하는 다른 요소들과 긴밀한 연계 속에서 의미와 가치를 지니 고 있다. 한편, 2015 개정 한문과 교육과정에서는 ‘의사소통 능력’, ‘정보처리 능력’, ‘창의적 사고 능력’, ‘인성 역량’, ‘심미적 감성’ 5가지의 교과역량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기존에 없던 새로운 내용을 추가한 것이 아니라 그간 한문과 교육과정의 성격에 포함되어 있던 내용을 역량이란 관점에 서 요목화한 것이다. 즉, 한문과 교육과정에 제시된 교과역량은 총론에서 제시한 핵심역량과 궤를 함께하면서도 한문과 고유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김이사부는 신라사와 민족사에서 의미깊은 역할을 담당했다. 현재의 울릉도인 우산국을 공격하여 복속시켜 동해중부의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울릉도와 독도는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다. 또한 신라의 해양력을 강화시켜 삼국을 통일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21세기는 강대국들 간의 해양력 경쟁이 불가피하다. 한국 및 중국 러시아 일본은 동해에서 갈등과 충돌이 예상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사부는 역사적으로 재조명할 필요가 있으며, 미래의 인물 내지 정책 모델로서 삼을 필요가 있다. 기념일을 제정하려면 몇 가지 기준이 필요하다. 첫째, 김이사부의 행위, 신라의 정책과 사상성, 동해와 울릉도의 실질적인 위상과 정신성 등을 반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둘째 김이사부를 군사적 영웅으로만 해석하거나 부각시키지 말고 정치가로서 부각시키는 관점이 필요하다. 셋째, 김이사부의 우산국복속을 현재적 의미, 미래적 가치를 학문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으로 추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넷째, 기념일은 역사기록을 존중하여 음력 6월에 해당하는 7월 하순또는 8월 초순이 바람직하고, 한민족의 사상성과 민속, 미래가치를 지향해서 3일을 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글은 19세기 전반 경상우도 지역에서 활동한 河範運이 三山九曲詩를 창작한 것에 주목하여 그 내용과 의미를 분석한 것이다.하범운은 河溍의 6대손으로 19세기 전반 진주에서 활동한 남인계 학자이다. 그는 남명학과 퇴계학을 겸취하여 극도로 침체된 지역의 학풍과 기강을 부지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그의 학문성향은 讀書明理와 閑邪謹獨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의리를 종자로 삼고 그 의리를 일상에서 실천하는 삶을 지향하였다. 이러한 점은 「自省箴」과 「山中懷古」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경상우도 지역은 경상좌도 지역에 비해 구곡문화가 발달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지형적으로 화강암 지대가 적어 구곡이 형성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 지역 학자들이 구곡문화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남명을 제향한 덕천서원 인근은 지형적으로 구곡을 설정한 만한데도 덕산구곡을 설정하지 못하였다. 그러다 19세기 전반 하범운이 처음으로 덕산구곡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덕산구곡시를 창작하였다.하범운은 1823년 안동으로 李野淳을 방문하였을 때, 이야순이 陶山九曲 詩와 玉山九曲詩를 보여주며 차운을 청하여, 집으로 돌아와 차운시를 지어 보내면서 덕산구곡시를 추가하였다. 그리하여 晦齋·退溪·南冥을 제향하는 서원이 있는 곳을 ‘三山’으로 칭하고, 이 삼산에 구곡이 있는 것은 도학의 원류가 영남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여 ‘三山九曲詩’라고 명명하였다. 이는 安德文이 세 선생을 추숭하여 三山書院의 명칭과 위상을 정립한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이 점이 그가 삼산구곡시를 지어 덕산구곡을 도산구곡·옥산구곡과 나란히 드러내려 한 창작 배경이다.하범운이 지은 삼산구곡시의 덕산구곡시는 앞 시대 鄭栻이 덕천서원 뒤 산골짜기에 경영한 武夷九曲에 나아가 제목을 德山九曲으로 개정하고 曲名을 일부 바꾸어 노래한 것이다. 그런데 하범운의 덕산구곡시와 정식의 무이구곡시를 비교해 보면 내용이 판이하게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정식은 주자의 「무이도가」의 정신을 그대로 본받으려 한 반면, 하범운은 남명의 精神과 氣節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하범운의 덕산구곡시는 남명의 학문과 정신을 회고하고 추앙하며 자기 시대의 쇠미해진 도를 탄식하는 내용이다.하범운이 삼산구곡시의 하나로 덕산구곡시를 추가한 것은, 安德文이 三山書院의 명칭과 위상을 정립한 정신을 계승하여 남명의 덕산을 옥산·도산과 하나로 합해 도학의 연원과 학문의 본질이 같다는 점을 드러내려 한 것이다. 여기에 그가 지은 삼산구곡시의 의미가 있다. 하범운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덕천서원이 있는 덕산에는 남명의 유적을 중심으로 덕산구곡이 설정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조선 후기 이 지역 인사들의 구곡문화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퇴계 후손들이 도산구곡을 적극적으로 설정한 것처럼 남명 후손들은 덕산구곡을 설정하는 데 적극적이지 못하였던 것이 덕산구곡이 설정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