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의 유배는 주로 정치범에게 적용되었던 형벌이었다. 정치 상황이나 죄인의 신분 혹은 죄의 경중에 따라 유배지도 결정되었다. 특히 조선 중기에 들어 당쟁이 치열해지면서 유배는 대부분 섬으로 가게 되었다. 유배는 현대와 달리 비리에 의한 것보다는 당쟁의 결과였으며 정치적인 속성을 띄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본 고는 이를 위하여 유배가 주는 우리의 문화유산을 긍정적으로 보는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이를 조선 후기의 우봉 조희룡의 심미경계를 통하여 고찰하였다. 그는 여항문인화가로 임자도에서 19개월간의 유배 생활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육체적 정신적 시련과 한계상황을 극복하여 자신의 예술세계를 심화시켰다. 그는 자신의 처소인 만구음관 주변에 자생하는 대숲의 자연을 통하여 묵죽의 문인화에 천착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의 묵죽 문인화는 심미경계를 심화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그의 묵죽의 심미경계는 독표성령(獨標性靈)의 심원미학(心源美 學)⋅자출기저(自出機杼)의 심장미학(心匠美學)⋅자성별구(自成別區)의 심득미학(心得美學)에 나아갔다. 심원의 미학은 조희룡의 독자적인 성령론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심장미학(心匠美學)은 스스로 우러나와 이루어진 자출기저(自出 機杼)이다. 또한, 심득의 미학은 스스로 자신의 개성을 바탕으로 한 자성별구 (自成別區)였다. 이와 같이 조희룡 묵죽의 심미경계는 심화 경지에 나아가게 되었다. 이와 같이 그의 유배는 역으로 한 예술가에게 자신의 예술에 천착할 수 있는 기회도 주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 문인예술은 유배를 통하여 그 깊이의 세계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역으로 이러한 측면 에서 살펴보면 유배문화는 우리 문화예술에서 하나의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