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검색조건
좁혀보기
검색필터
결과 내 재검색

간행물

    분야

      발행연도

      -

        검색결과 3

        2.
        2010.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청학동은 우리 漢詩史에서 ‘이상향에 대한 동경’이라는 시적 제재로 사용되어 진 주요한 모티브 중 하나였다. 그리하여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상향에 대한 동 경의 실천태로써 이른 시기부터 청학동을 찾았다. 초기 청학동을 찾는 이들에 게 ‘청학동’은 선계 공간이라는 이상향이었다. 현실 세계에 존재할 수 없는 선계 로의 탐방은 부정과 좌절이라는 정서로 시화되어 나타난 것이 주를 이루었다. 청학동이라는 선계로의 유람은 현실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갈등과 회한이 어 우러져 있다. 다만 일반적인 산수시와 달리 청학동 소재 한시에 나타난 청학동 이라는 공간은 수기의 방편으로 사용된 예가 드물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류의 작품에 드러난 청학동은 현실 밖, 피세의 관념적 공간이자, 현실 속에서 부정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었다. 열망과 부정의 모순된 정서가 시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상향에 대한 동경이라는 인간의 욕망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리산의 특정 지역을 청학동에 비정하였고, 관념 속의 청학동은 현실적인 명승공간으로써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후 청학동은 선계 공간으로서의 지위와 명승 공간 으로서의 지위를 모두 지니게 되었다. 지식인의 한시 작품에 나타난 명승으로써의 청학동은 현실의 불행이 완전하 게 단절된 공간, 갈등과 번민이 없고 조화롭고 평화로운 공간으로 인식되는 경 우와 현실 밖, 피세의 관념적 공간이자, 현실 속에서 부정할 수밖에 없는 공간 으로 인식되는 두 가지 경향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모든 공간들은 열정과 한계 로 인하여 여러 양상으로 나타났지만, 과거 지식인이 추구하였던 이상향이었다. 시인이 청학동을 선계공간으로 인식하였든, 명승공간으로 인식하였든 공통적 으로 나타나는 요소는 현실 세계에 대한 철학적 부정을 통한 이상향에 대한 동 경이었다. 또한 이러한 시적 전통은 ‘청학동’이라는 특정 공간이 우리 민족의 이 상세계에 대한 구체화 작업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3.
        200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에서는 주로 조선의 사대부들이 남긴 지리산 한시를 통하여 지라산에 대한 그들의 사상적 인식이 어떻게 드러나 았는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비록 유학자 내지는 유학척 교양과 식견,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에 젖어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시이가는 하지만, 그들이 지리산과 관련지어 말한 사상의 폭은 외 형적으록 매우 포괄적으로 나타나 보였다. 하지만 이면적인 성격을 살펴보면 이들 의 유가척 안식도 매우 폭이 좁고, 불교나 도교 그리고 민간신앙에 대한 인식은 매우 자신틀의 편의에 맞추어져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유가적인 인식은 ‘존현’ 정신으로 특정지을 수 있다. 도가적 인식은 ‘유선’ 사상 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불가적 인식은 ‘향도’ 의식으로 특정지을 수 있다. 민간신 앙적 인식은 ‘불배’ 의지로 특정지을 수 있다. 이들이 지리산을 가는 동안, 그리고 지리산 위에서 보고 겪은 것에 지리산에 대 한 인식이 다양하게 드려나 었는데, 지리산을 다녀온 뒤의 생각에도 또한 유가적인 생각을 바탕으후 한 감회를 피력한 것이 많다. 지리산에 오르거나 다녀오니 현 설의 막힌 것 흑은 물든 것이 터지거나 씻어졌다고 감회를 밝혔다. 한마디로 마치 신선세계에 오른 것 같다고도 하였으나, 이들이 현실로 돌아올 때의 사상적 지향 점은 역시 유가로 선회하고 었음을 볼수있다. 유학적 현실에 담갔던 몸을 빼어 지리산으로 향함에 그것에 대한 인식이 유불도 및 민간신앙에까지 미쳤지만 유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다시 현실로 돌 아옴에 유가적 본연으로 회귀함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신선세계의 하나로 일컬어 지고 하고, 가장 많은 절을 안고 있으며, 그 꼭대기에 민간신앙의 대상이 자리잡고 았는 지리산을 읊은 사대부들의 한시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 그것이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