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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1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은 15-16세기 베트남 청화백자를 제작한 가마의 형태분석과 여성이 도자 제작에 참여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도자를 분석하여 베트 남 청화백자의 특징을 알아보고자 한다. 기존 논문에서는 중국 청화백자와의 유사성에 초점이 맞춰져 이 부분이 미비하였다. 이 부분을 보강 하기 위해 현지조사를 통해 얻은 자료와 현지 학자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베트남 청화백자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청화백자는 생활용품이자 고가의 무역품이었다. 15-16세기에 베트남은 국내 도자 제작 수준의 발전과 명 해금정책의 배경으로 청화백자를 동남아시아, 류큐, 터키, 이슬람 지역권 등으로 수출하였다. 각국으로 수출된 청화백자는 베트남 북부 지역에 있는 가마에서 주로 생산되었으 며, 북부 지역의 가마가 중국의 가마 형태를 모방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대표적인 청화백자 생산지인 쭈더우(Chu Đậu) 지역의 가마 형 태를 조사한 결과로는 중국의 용요와 만두요와는 다른 특징을 보여 베 트남 지형에 맞게 재해석하여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명이나 조선에서는 여성이 도자 제작에는 참여할 수 없는 것이 일반적 이었다. 하지만 베트남에서는 톱카피 사라이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청화백자모란문천구병>이나 16세기 쭈더우 지역과 근접한 곳에 거주한 도공의 아내인 응우옌 티 딘(Nguyễn Thị Đỉnh)이 도자를 제작했다는 흔 적이 남아있어 여성이 도자 제작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완성된 청화백자는 시간이 흐르면서 베트남적인 특징을 보이게 된다. 수많은 동물 기형을 만들고 정병(켄디)라는 특수 기형을 제작하였다. 베트남 청화백자는 중국처럼 용이나 봉황과 같이 상상 속의 동물을 사용 하기도 하였지만 베트남의 자연환경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현실적인 동물인 코끼리, 앵무새, 복어, 물소 등을 기형이나 문양에 활용한 독 특함을 선보였다. 특수 기형인 정병(켄디)도 동아시아에서 주로 생산되 던 형태와 다르게 주구가 보다 길며 손잡이가 없고 높이가 낮은 형태로 상당수 생산되었다. 이를 통해 베트남 청화백자가 중국 도자를 모방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선택적으로 중국의 양식을 수용하면서 점차 베트남 특유의 미감을 담아낸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도자 수출, 제작법, 도자 형식 등을 통 해 베트남 청화백자만의 의의도 함께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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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5.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우리 도자의 역사에서 고려시대 청자의 대표를 梅甁이라 한다면 조 선시대 백자는 龍樽이라 할 수 있다. 청화로 그린 용준은 조선의 개국 이후 체제가 정비되고 儀禮와 관련 器皿制式이 정립되는 첫 단계부터 조선왕조의 마지막까지 기본 골격을 준수하면서 시종일관 하였다. 따라서 청화용준을 조선백자의 상징이며 중심적 존재라고 하는 데 이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간에 연구 경향은 17세기에 청화재료 수급이 어려워지면서假畵와 鐵畵재료인 石間硃를 썼고 또 그러한 상황이 오래 지속 되었 다는 전제 아래 ‘철화백자의 시대’라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결국 이러한 입장을 취함으로서 조선백자의 근간으로 조형의 중심을 이끌며 일정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온 청화용준이 일백년 가까이 단절되었고 다시 18세기에 새롭게 구성한 조형체계로 재등장 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러한 인식은 조선 중, 후기 백자의 전개에서 조형정신의 계승은 물론 조선사회 를 구성하는 지적 엘리트들의 일정한 美意識을 규명하는데 심각한 장 애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임진란 이후 광해군11년(1619)에 와서 어렵게 청화를 구하여 용준 제작이 가능해졌고 이후 왕실의 雙龍樽제작은 19세기까지 지속 되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현존하는 조선중기, 후기 청화백자 쌍용준의 조형적 특징을 기준으로 여섯 유형으로 나누고 각각 의 성격을 분석했으며, 여기서 分院窯址出土철화용준의 절대편년 자 료를 대입하여 분류 기준의 당위성도 확인하였다. 조선시대 철화백자는 사용주체도 달랐고 명분도 분명히 달랐다. 철화는 청화와 함께 상하관계를 유지하며 동일한 시공간에서 각각 다른 조 형의장을 계승하면서 일정기간 동안 공존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상적 인 계급사회의 정착을 추구했던 조선의 司饔院分院에서 정통성을 갖 는 청화백자와는 전혀 다른 위치와 기능으로 17세기 동안 독자적 철화 백자의 조형체계를 확립했고 곧 이어 간소화 쇠퇴하면서 지방 民窯로 이전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조선시대 백자의 대표격인 용준의 조형체계를 밝히는 일은 조선백자 의 근간을 밝히는 근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일이다. 조선 전 기에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었던 樽은 17세기 전기를 지나면서 한 가지로 통합 되는데 그 과정에서 청화백자 쌍용준의 역할이 절대적이었 다. 제작 주체였던 사대부들의 관심이 제왕의 쌍용준에 있었을 가능성 이 높기 때문이다. 士大夫들은 이 용준에 용 그림 대신 四君子와 花鳥, 山水, 人物, 魚 蟹, 十長生등 새로운 그림들을 敎化와 祈福의 기능을 존중하면서 그려 넣었다. 따라서 용 그림 주변에서 莊嚴을 상징했던 당초, 여의두, 劍形 蓮瓣같은 종속문양대를 생략하거나 단순화하는 것이 신하로서 사대부 가 지켜야 할 도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조선후기 上品畵樽가운데 검형연판문대를 갖춘 예가 박병래선생 기증품 <白磁靑畵山水文樽>(높 이 38.1) 한 점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러한 제작 분위기를 설명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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