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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임진년(1592) 오월 진주성 촉석루에서 김성일, 조종도, 이로(혹은 곽재우)가 남강에 투신하여 죽음을 결행하려 했던 사건과 관련되어 지어진 시에 관해 언급한 여러 기록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삼장사에 관한 사적을 기록한 글로는 「從遊諸賢錄」(성여신 찬), 「鶴峯言行錄」(최현 찬), 「矗石樓詩懸板」(오숙 찬), 「大笑軒事蹟畧閭表碑」(찬자 미상), 「矗石樓詩註」(김응조 찬), 「大笑軒行狀」(한몽삼 찬), 「請祠祀三壯士疏」(하세응 찬), 「鶴峯年譜」(이재 찬), 「松巖李先生行狀」(조선적 찬) 정도가 『용사일기』가 印刊되기 이전의 기록으로 살펴진다. 이들 자료에는 대부분 삼장사시의 지은이를 김성일로 기록하고 있으나, 시의 작자를 다른 사람인 것으로 기술한 경우도 있고, 남강에 투신하여 죽음을 결행하려 했던 사실을 언급하면서도 시를 지었다는 사실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 것도 있다. 1762년 간행된 이로의 『용사일기』는 동일 저자가 지은 「문수지」와는 달리 삼장사시의 작자가 김성일이고, 그와 함께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인물을 조종도와 이로로 기술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로 사후 백수십 년이 지난 뒤 이 책이 출간된 배경에는 삼장사 사당의 건립과 관련해서 현실적인 이해 관계가 문중 간에 얽혀 있었다. 인간된 『용사일기』는 이로가 찬한 원래의 초본에 적지않은 첨삭이 가해졌기에 출간 당시부터 문제가 되었으나, 『용사일기』의 출간에 뒤이어 한몽삼의 글이 수록된 『대소헌문집』이 간행되어 이-삼장사설을 뒷받침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현풍 곽문에서는 『망우집』을 중간하여 곽-삼장사설을 주장하게 되면서 이후 양측의 주장이 심각히 대립하였다. 『망우집』의 발간으로 점화된 삼장사 시비에 관여하여 가장 정밀한 수준에서 이-삼장사설이 옳음을 논증적으로 밝힌 이는 대산 이상정이었다. 이상정이 찬한 『촉석루시사적』은 학봉이 초유사로 함양에 도임한 때로부터 이후 진주성에서 촉석루시를 짓기까지 『용사일기』의 기록을 위주로 김성일, 조종도, 이로, 곽재우 4인의 행적을 발췌해서 정리하고, 이에 대해 이상정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여 이-삼장사설이 옳음을 논증한 내용이다. 이상정은 무엇보다도 촉석루시의 작성 시점이 조종도가 의령에서 돌아온 직후라는 사실에 주목하여, 조종도가 의령에서 돌아왔을 때 곽재우는 이미 진주를 떠나 의령으로 돌아와 있었으며, 대신에 이로가 진주에 있었다는 사실을 논증하였다. 『촉석루시사적』의 간행 이후 촉석루 삼장사에 관해서는 이-삼장사설이 통설의 지위를 차지한 듯이 보인다. 이후에도 삼장사 사적에 관한 이견(異見)이 간간히 표출되었으나 마침내 근년에 진주성에 삼장사 비를 세우면서 이-삼장사설의 내용이 ‘촉석루중삼장사기실비’의 비면에 새겨지게 되었다. 이로써 촉석루 삼장사시는 김성일이 지었고, 당시 시를 짓는 현장에는 조종도와 이로가 함께 있었다는 것이 실효적 사실로 자리잡아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