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여성들을 위한 규범서가 있다. 그 가운데 여사서는 영조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책으로 여성의 교육과 덕행 및 수 양 등을 기록한 책이다. 1736년에 간행한 초간본과 1907년에 간행한 중간본 그리고 이후 중간본을 토대로 19세기경에 한글로 필사한 필 사본이 전해지고 있다. 이 가운데 국립한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필사본은 간행본과 달리 한글로만 필사되어 있고 한글서예가들이 범 본으로 삼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이 필사본을 참고로 하여 먼저 간단하게 서지학을 살펴본 후 이를 기저로 하여 필사본 ‘정자’에 나타난 결구와 서사기법의 특징 및 예술적, 서예적 가치를 살펴보았다.
이에 대한 연구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서지학 연구는 『여사서』가 국내로 유입, 간행한 동기ㆍ시 대배경ㆍ언해자ㆍ내용ㆍ여사서의 종류와 서체 등을 살펴보았다.
초간본은 1736년(영조 12년)에 홍문관 제학 이덕수에게 4권 3책의 『여사서』를 언해하도록 명하여 간행하였고 출판된 번역본에 영조 가 직접 서문을 썼다. 언해 순서는 『여계』ㆍ『여논어』ㆍ『내훈』 ㆍ『여범』순이고 언해 방식은 원문에 독음과 구결을 단 후에 한 칸 낮추어 언해를 첨부하였다.
중간본은 1907년에 간행한 목판본 『여사서』가 있다. 이는 박만환 이 한글로 번역한 뒤 송병순이 서문을 쓰고 전우가 발문을 적은 것 이다. 순서는 초간본과 달리 『여계』ㆍ『내훈』ㆍ『여논어』ㆍ『여 범』의 순서로 실려 있다. 이 중간본은 언해가 초간본과 전혀 다르다. 한자음은 없고 한문 원문을 싣고 그 뒤에 언해를 붙였는데 이 언해 는 초간본에 비해 의역체인 점이 크게 다르다. 초간본의 판 사항은 활자본이고 중간본의 판 사항은 목판본이며 이후 중간본을 모본으로 삼고 필사한 필사본은 모두 년대와 필사자가 미상이다.
둘째, 국립한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여사서> 필사본 가운데 정자를 선택하여 서사기법의 특징을 결구와 기법으로 나누어 살펴보 았다. 초성과 중성에 접필하여 필사한 가로 점은 앙ㆍ평ㆍ부와 같이 3종류로 분류하여 부드럽고 우아함이 나타난다. 기필 부분은 45° 각 도의 노봉으로 꺾어 예리하고 굳세다. 가로획 수필 부분은 대체로 무 겁게 눌러 필획을 전환하면서 수렴 회봉하여 굳세고 온후하며 부드 러운 느낌이 나타난다. 필획의 굵기와 방향은 변화를 많이 주지 않았 고 자간은 붙이고 행간을 넓혀 시원해 보인다. 공간 배분은 비율이 같아 형상은 단아하고 아름다우며 엄숙함이 나타나 규범서로서 손색 이 없는 글씨이다.
셋째, 한글 필사본 자료의 가치는 예술적 가치와 서예적 가치를 함 유하고 있다. 먼저 예술적 가치는 한글이 가지고 있는 미적 조형의 규율에 따라 예술적으로 갖추어야할 법도가 충족 되고 우리글의 우 수성과 아름다운 글씨로서 손색이 없다. 서예적 가치는 범본으로 삼 고 있는 필법이 부합되어 한글서예 작품으로 가장 핵심적인 가치라 할만하다.
이상과 같이 본 논문에서는 <여사서>의 서지학과 서사기법에 대 한 이론을 연구하였다. 비록 문자의 결구와 기법에 대한 간단한 연구 이나 이후 한글서예의 이론 연구에 기초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 글은 月川 趙穆(1524-1606)의 『月川集』 필사본과 간행본의 내 용을 비교하여 개정의 특징과 의의를 고찰한 것이다. 『月川集』은 조목의 아들 趙錫朋이 간행을 주도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시 950여 수를 비롯해 필사본에 수록된 다수의 작품이 산삭되었다. 산삭의 양상을 살펴보면 특징적으로 류성룡과 관련된 민감한 작품들이 산삭되었는데, 이는 ‘主和誤國’의 내용을 지우려는 김응조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 영향력은 문집의 서문을 수정하고 言行記와 더불어 혐의가 될 만한 다수의 작품이 산삭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만사ㆍ제문의 경우, 조목의 도산서원 종향을 추진했던 문인의 작품은 수록하고, 그렇지 않은 인물의 작품은 산삭되었다. 시에서는 남명학 파의 권역에 있는 인물을 숨기거나 정인홍을 의도적으로 폄하한 흔적이 보였고, 그 중 儒家에 유익하다고 판단된 시는 제목을 변경해서 간행 본에 수록하였다. 이상의 특징을 종합하여 『월천집』 개정이 외부의 영향과 간섭을 받으면서 진행되었고, 상대적으로 조목 문인들은 이에 대응할 자체적인 기반이 약한 상황이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