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윤석열 신정부가 출범하고 한일관계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신정부는 대일 관계를 개선하려 하지만, 한일관계의 개선은 역사 적 연원에서 양국의 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한일 간 문제의 핵심 쟁 점인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에서 유발된 ‘한일무역 분쟁’과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의 효력 종료 결정으로 양국은 마찰을 빚어 왔다. 이에 역사·경제·안보 등의 갈등이 복합적으로 발생하면서 한일관계 회복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현재 갈등을 빚고 있는 무역·안 보 등에서 양국의 협력이 이루어지더라도 민감한 과거사 문제와 군사· 안보협력의 완전한 회복은 어렵다. 한일관계 개선은 단순히 양국의 문 제만은 아니며, 한반도와 동북아 전체에 영향을 기 때문이다. 신정부는 일방적으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서두르는 것보다 우선 양국이 미래 발전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며, 국내 진보와 보수의 의견을 통합하고 국민적 동의가 이뤄질 때 비로소 화해·협력이 가능하다. 지금 의 국제관계는 국가 간 상호의존도가 매우 높으며, 과거보다 훨씬 복잡 하게 얽혀있다. 따라서 새로운 한반도 평화와 안보위기의 국제관계를 잘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은 동북아에서 균형 있는 중립외교로 한 일관계를 개선하고 한반도 주변의 동북아 강국들과의 관계발전에서 독 립성과 형평성을 유지해야 한다.
This study aims to evaluate the status of implementation of bilateral-fishery order since the Korea-Japan Fisheries Agreement came into effect in 1999 in order to improve fisheries relationships between two countries. The agreement regulates bilateral-fishery order by the principle of the EEZ regime and mutual benefits among countries. (e.g. the mutual agreed fishing in EEZ and cooperation for resource management). However, the Korea-Japan Fisheries Agreement has some limitations such as reducing quotas of the mutual agreed fishing in EEZ, strengthening Japanese fisheries regulation, insufficient cooperation for fisheries management and joint countermeasures. In order to improve fisheries relationships between the two countries, it is imperative to rebalance quotas for the mutual agreed fishing in EEZ, to establish effective resource management systems in the Intermediate zone, to invigorate fisheries cooperation in the private sector, and to introduce new management systems by species over the all waters around East Asia. To accomplish such measures, it is necessary for Korean and Japanese governments to improve fisheries relationships based on trust and cooperation, achieving a win-win situation. Additionally, it is required to incorporate fisheries management among Korea, China, and Japan.
본 연구는 한일관계에서 영토교육이 어떠한 현재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조명하는 것이다. 논쟁의 초점은 한국과 일본의 영토교육 현황을 검토하고, 특히 경상북도와 시마네 현의 독도교육 사례를 비교 분석하여 그 실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경상북도의 독도교육은 체계적이고 지속적이며, 의식고취에 중점을 두고, 시공간을 초월해서 진행되고 있는 반면, 시네마현의 독도교육은 공격적이고 치밀하며, 생활사에 초점을 맞추고, 중-장기 적인 영토 반환전략 등을 통해 자국 중심으로 진행하고 있다. 한일 양국이 영유권 문제와 연관된 독도교육을 자국 중심의 관점에서 실시하다 보면, 양국 국민의 인식 차이는 더욱 벌어져 그 격차를 좁혀 나가기 매우 힘들 것이다. 이는 동북아시아 국가 간의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주권을 강조하는 현재의 국가 체제가 수평적이고 다층적인 지역공동체 교육으로 전환되고 있는 시점에서 자국 중심의 독도교육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원론적인 고민에 빠지게 한다. 특히 본 연구에서는 동북아시아의 올바른 역사적 인식과 지역공동체적 시민의식이 갖는 보편성을 기반으로 한 영토교육의 이론화 작업을 통해 독도교육의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는 독도문제에서 배타적 민족주의 접근 방식을 채택했던 기존의 영토교육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동북아지역 차원의 지역공동체적 시민주의 관점에서 미래 지향적인 한일관계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바람직한 독도교육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려는 시도이다.
이 글은 과거, 주로 식민지 시기의 한-일 연대 투쟁의 경험에 기반하여 앞으로의 한-일 민간 사회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의 발전적인 가능성들을 모색해보는 시도이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연대’는 무엇보다 어느 한 쪽의 ‘맹주론’, 즉 그 어떤 불평등한 전제조건들도 수반하지 않는, 한-일 양쪽 민중의 교류와 공동의 투쟁을 뜻한다. 따라서 묵시적으로나마 ‘일본맹주론’을 저변에 깔았던 구한말 시절의 일본 범아시아주의자들의 ‘연대’를 가장한, 내지 표면적으로 ‘연대’의 기치를 내세운 제반 시도들을 여기에서 제외시키고, 아울러 한국 인의 ‘열등성’을 전제로 하는 식민지 시기의 각종 부일(附日)협력 행위들과 엄격히 구분시키 려고 한다. 그리하여 여기에서 주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매우 급진적인 (사회민주주의와 의 경계선에 선) 자유주의자나, 사회민주주의자, 공산주의자 내지 무정부주의자 등 일본제 국에 비타협적으로 저항한 만큼 또 하나의 저항주체인 조선민족과 평등한 동지적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그나마 보였던 부류들이다. 조선 독립의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었던 매우 급진적인 – 거의 사회민주주의자에 가까운 - 자유주의자로 법조인 야마자키 게사야와 같은 양심 인사들을 언급할 수 있으며, 그와 함께 (일본인 반체제 투사들과 함께) 조선 및 대만의 반체제 투사들을 변론해준 후세 다쓰지는 대체로 사회민주주의적 성향으로 분류된다. 마찬가지로 1920년대 반(反)식민지 문학의 창시자인 나카니시 이노스케도 – 비록 전후에 공산 당에 입당했지만 – 그 당시로서는 사회민주주의자에 가까웠다. 그들보다 훨씬 더 많은 희생 을 치르면서 조선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억압적 체제에 같이 맞섰던 이들은 바로 학계 (미야케 시카노스케 교수)나 가장 선진적인 대기업들에서 (이소가야 스에지) 공산주의적 운동을 전개한 투사들이었다. 일본 ‘내지’와 중국에서 한-중-일 무정부주의자들의 연대투쟁도 1920년대 초반부터 꽃피웠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도들의 의미를 높이 사는 동시에, 그 한계도 지적해야 한다. ‘평등한 공통투쟁’이라 해도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길러낸 아비 투스가 그대로 작동돼 일본 내 공산주의적 조직 안에서도 조선인들을 타자화시킨 일이라든가 일본 무산계급 작가들의 작품 (오구마 히데오, 장장추야)에서 조선을 여성화시켜 오리 엔탈리즘 논리의 적용 대상으로 만드는 등 반체제 투사들도 체제의 논리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했다. 결국 일제의 패전 이후에는 무장투쟁 등 다양한 모색의 기간을 거친 일본공산당 은 1955년6월의 제6차 대회 이후에 체제내 편입의 길을 택함과 동시에 (일차적으로 일본 내의) 조선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거의 끊어버리고 말았고, 비슷한 시기에 북조선도 마르크스-레닌주의적 국제주의보다 훨씬 더 민족주의적인 노선으로 가게 됐다. 이렇게 해서 식민지 시기 한-일 연대 투쟁의 유산은 점차 역사 속에 묻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