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語 어휘집 《譯語類解》는 중인층인 역관의 외국어 학습을 돕는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1682 년에 간행됐다. 그런데 이 책은 주된 사용층이 아닌 조선후기의 사대부 지식인 사이에서도 종종 언급되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의외의 현상을 類別하고 각각의 사대부 독자가 지닌 자국어에 대한 태도를 사회언어학의 측면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權萬은 변방의 지식인이라는 조건에 기인한 문화적 소외감으로부터 출발하여, 중화의 음률을 터득하고 제대로 된 한시를 쓰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설정했다. 그 과정에서 권만은 《역어유해》와 《노걸대》 등의 중국어 학습서를 접했으나, 이처럼 당대의 漢語 현실을 재현한 결과물은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권만의 구도 안에서 한어는 중화의 언어와 오랑캐의 변종적 언어라는 위계로 나뉘며, 그가 참조한 《역어유해》는 후자의 영역에 해당한다고 간주됐다. 그는 16세기 초에 간행된 《사성통 해》로 회귀하여 正音, 즉 동아시아 문화권에 통용되는 표준음을 찾고자 했다.
李瀷의 인용법은 그가 권만과는 상당히 다른 시각으로 《역어유해》를 접했음을 보여준다. 이익은 조선 땅에서 재배되는 특정한 식물의 구체적 특성을 기술하고 이름을 밝히기 위해 ‘玉薥薥’(옥수수) 과 같은 작물의 이름을 《역어유해》로부터 추출했다. 권만이 漢語의 발음기호를 확인하기 위해 《역 어유해》라는 사전을 검색했다면, 이익은 해당 어휘의 지시 내용에 주목했다. 安鼎福은 스승의 시각을 계승하여 《역어유해》에서 ‘饅頭’라는 한어 어휘를 검색하고 그것이 ‘상화’라는 조선 음식에 상응함을 확인했다.
丁若鏞과 金邁淳에게 주된 관심의 대상은 조선의 고유어 어휘가 아니라 자국에서 사용되는 수많은 한자어들이다. 중국 고전 한문에 뿌리를 둔 이 어휘들이 근본에서 벗어나지 않고 원의대로 정확히 사용되고 있는지의 문제가 이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했다. 이 구도 안에서 중국의 한자어와 조선의 한자어는 상하의 위계질서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
李德懋와 李圭景이 공유한 언어학적 구도는, 정약용이나 김매순의 그것과 분명히 구별된다. 이덕 무는 중립적인 시선으로 동아시아 각국의 언어를 검토하며 자국어에 대한 지식의 체계를 만들어나 갔고, 각국의 언어 사이에 위계를 부여하거나 질서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작동시키지 않았다. 이규경 은 조부의 언어학적 구도를 계승하였을 뿐 아니라 자국어에 대한 구체적인 자각이라는 점에서 보다 확장된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던바, 이는 그가 적극적으로 수집하여 제시하고 있는 고유어 物名의 상세한 목록을 통해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