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의 초기 동만지역 한인에 대한 인식은 국공합작이 분열된 후, 동북지역 에 중공당 만주성위가 건립되면서 시작되었다. 첫째시기는 1928년 8월 동만지역에 중공구위(中共區委)가 창립되면서 지식계나 교육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사업을 추진 했으나 한인농민들 속에서 당원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구추백(瞿秋白)의 좌경맹동(盲 動)주의의 영향 하에 4개월도 안되어 조직이 무산되었다. 둘째시기는 중공이 동만 한 인들을 중국 내의 소수민족으로 간주하고 그들의 토지소유권과 참정권을 인정하였기 에 많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1국1당의 원칙하에 중공에 가입하여 반제반봉건혁명인 폭동운동을 일으켰다. 하지만 또 한 차례의 좌경모험주의 영항 하에 폭동은 실패로 끝났고 말았다. 셋째시기는 중공당이 민생단이 전개한 자치에 대해 동만지역의 특수 성과 한인민족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친일 혹은 반일적인 차원에서만 인식하 며 중국당화를 추구하면서 근거지 내의 한인들이 대거 숙청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숙청은 당시 왕명의 교조주의 좌경노선에 의해 확대되면서 수많은 한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논문의 목적은 악셀 호네트의 인정투쟁이론과 칼 슈미트의 정치개 념으로부터 발전시킨 ‘적대와 인정의 정치’ 틀로 공산체제 이후 헝가리 정치변화를 고찰하는 데 있다. 헝가리에서는 1990-2010년의 체제전환 기간에 온건다당제와 양당제를 가진 비교적 공고한 민주주의가 자리잡고 인정의 정치가 유지되었다. 정치세력 사이에 경쟁과 갈등은 존재했지만, 상대방을 정치무대에서 제거하고자 하는 적대의 정치를 발견하기는 어려 웠다. 그러나 2010년 이래 헝가리의 정치는 엄청나게 변모하였다. 2010 년에 복귀한 오르반정부는 포퓰리즘을 대변하였고 3연임에 성공하였다. 오르반정부의 포퓰리즘은 비자유적 민주주의로 정당화되어왔다. 그의 정 부는 민주세력이나 반대세력을 억압하였고 언론자유를 침해해왔다. 또한 민족주의적 감정을 동원하거나 조장하였고, 반EU정책이나 반난민정책을 전개하였다. 오르반정부의 포퓰리즘으로 인해 헝가리에서는 인정의 정치 가 적대의 정치로 변모한 것이다. 2010년 이후 헝가리 민주주의는 후퇴 하고 악화되었으며, 헝가리정치는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사이에서 표류하 고 있다. 지오반니 사르토리의 정당체제이론을 헝가리에 적용하면, 헝가 리는 일당우위치제와 패권정당체제의 경계선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 연구는 해방 이후부터 제1공화국 시기까지 이승만의 권력 기반이 된 주요 변수를 중심으로 우익 정치세력 내에서 그의 권력 장악 과정을 살펴보았다. 우익 정치세력 내에서의 권력의 장악에는 여러 가지 변수가 작용하였으나 이 중 대중동원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반공 이데올로기를 주요 변수로 삼아 설명하였다. 이승만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정치 적 힘 겨룸에 우익 대중단체와 경찰, 군부, 청년단체 등의 대중을 적극적 으로 활용하였다. 또한 이승만은 일제의 귀속재산 불하와 미국의 무상원 조 등을 전략적으로 이용하여 측근들을 중심으로 하는 충성과 시혜로 얽 힌 후원-피 후원의 구조를 만들고, 농지개혁을 단행하여 농민을 자신의 지지 기반으로 끌어들여 그의 통치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승만은 '반공'과 '북진통일'을 앞세운 반공 이데올로기를 지배 이데올 로기도 활용하였다. 반공 이데올로기는 실제 대북용이 아니라 대내용이 었다. 북진통일 운동은 주민들을 하나가 되게 하여 철통 같은 반공 태세 를 강화하고, 그것의 영도자인 자신의 권력에 복종하게 했다. 권력 장악 과정에서 나타난 부산 정치파동과 발췌개헌은 이승만이 1960년까지 장 기 집권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제한된 구조적 틀 속에서 이승만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대중동원과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두 요소를 잘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