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읍성은 삼국시대 신라 달성에서 출발하여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평지 읍성으로 전환되는 장기적 공간 재편의 흐름 속에서 형성된 역사적 공간이다. 본 연구는 대구읍성의 형성과정과 시기별 축성법의 특징을 통시적으로 검토함으로써, 대구읍성이 단순한 방어시 설을 넘어 지방 통치 전략의 변화, 행정 중심지의 재구성, 교통·물류 거점 기능의 확장과 긴 밀히 연관된 복합적 역사 공간이었음을 규명하고자 한다. 달성은 삼국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대구 지역의 치소성으로 기능하였으며, 고려 공양왕 2년(1390)에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세종대에 관아가 평지로 이전되면서 달성은 읍성으로서 의 기능을 상실하였고, 이후 약 150년간 무읍성 시기가 지속되었다. 이후 선조 24년(1591), 임진왜란 직전에 평지 읍성이 초축되었다. 선조 34년(1601) 경상감영이 대구에 상설 설치되 면서 대구는 영남 지역의 행정·군사·물류 중심지로 확고히 자리매김하였다. 축성법 측면에서 초축 성벽을 토성으로 보는 기존 견해는 재검토가 필요하다. 동시기에 축조 된 청도·성주·삼가·영천·경산·안동·상주 읍성이 모두 석성으로 조성된 점을 고려할 때, 행정 위계가 높은 대구읍성만 토성으로 축조되었다고 보기에는 설득력이 낮다. 오히려 임진왜란 과정에서 석성 외벽이 파괴·붕괴된 이후 토성처럼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북벽 구간 발 굴조사에서 확인된 기저부 축성법의 차이 역시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영조 12년(1736)의 수축은 여장의 정형화, 총안 배치의 체계화, 성돌 규격화 등 구조적 기술 혁신을 수반한 축성사적 사건이었다. 이는 『기효신서』 수용 이후 조선 후기 축성기술이 성숙 단계에 도달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고종 7년(1870)의 재수축에서는 회삼물을 활용한 여장의 전면 신축과 돈대·포루·표루의 입체적 배치를 통해 방어 기능이 한층 강화되었으며, 임노동 기반 고용체제로의 전환이라는 조선 후기 사회 변화도 반영되었다. 대구읍성은 산성 중심의 군현 방어체계에서 평지 읍성 체제로의 전환을 상징하는 유산이자, 조선 후기 축성기술의 발전 단계가 집약된 대표적 평지 읍성으로 평가된다. 또한 「영영축성 비」와 「수성비」라는 두 금석문이 현존하는 유일한 사례로서, 조선 후기 지방 행정력과 사회 조직, 노동 체계를 보여주는 탁월한 1차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