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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Foreign Reception Hall in Gyeongungung Palace was constructed during 1899-1902 according to Yesigjangjeong (禮式章程), Korean Empire's modern diplomatic protocol. This bulilding is a case worthy of notice, because its construction process was written in Jubon(奏本), Korean Empire's official document. Yesigjangjeong(禮式章程) regulates the process of diplomat's audience with Emperor Gojong. The process suggested that Foreign Reception Hall was designed as the place of the end as well as the beginning for audience. According to the process, diplomat came through main gate, Daehanmun and outer gate of main hall(Junghwajeon Hall, Audience Hall), then arrived at the stair to Foreign Reception Hall. After waiting time in the hall, he was going to be granted an audience with Emperor. And he exited through Foreign Reception Hall as the reverse way. This hall was constructed as western-style. Subcontracted carpenters and wood sculptors and laborers from China represents that chinese workers were prevailed in the government construction at that time. And modern building materials, such as glass, colored brick, sanitary wares and lightings were applied, which showed the new landscape in the middle of Gyeongungung Palace. Above all, official documents related with this hall reveals Korean Empire supervised this construction for diplomatic protocol. That is the identity of western-style buildings in Gyeongungung Pa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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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4.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710년 청나라에서 해적이 출현하자 황제는 해적을 소탕하고 餘賊이 있을 까 걱정하여 조선에 알린다. 조선에서는 이에 대한 화답으로 謝恩使를 준비하여 謝恩兼三節年貢使로 정사 鄭載崙과 부사 朴權, 서장관 洪禹寧을 북경에 보낸다. 이들보다 앞서 10월 5일, 당시 39세 였던 한범석을 都摠府都事의 자격으로 북경에 보낸다. 한범석을 포함하여 1710년에 북경을 다녀온 조선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남긴 기록은 현재 발견할 수 없다. 다만 한범석이 조정에 狀啓로 올린 「單使赴燕時」와 「到義州報狀」이 남아 있는데, 이 때문에 한범석이 북경을 다녀온 전후의 과정과 목적은 이들 장계와 「赴燕詩」,『조선왕조실록』같은 자료를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당시 청나라는 강희가 황제로 있었을 때였다. 즉위 초부터 왕실의 반대파인 鰲拜를 제거하고 三藩의 난을 평정하였지만 중국 전역에는 여전히 작은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浙江, 湖光 등에서는 苗賊이 해변에 출몰하였고, 陝西와 階州 지방에서는 라마교의 난리가 일어났으며, 甘肅省 서쪽에서는 喝爾靼이 반란을 기도하고 있었다. 조선에 영향을 끼쳤던 해적은 金州에서 소탕되었다. 원래 이들은 남방에서 일어나 북상하면서 登州와 萊州 지역에 출몰하였고 이어 북쪽 요동반도의 旅順 부근에 있는 金州까지 세력을 뻐친다. 한범석은 이 전후의 과정을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하고 있다. 특히 해적의 규모라든가 전술방법 같은 것도 소상하게 보고하고 있다. 이들 기록들은 주로 북경으로 가는 동안 鳳凰城에서 얻은 정보와 심양에서 들은 것, 해적의 피해를 입은 李重德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정리하여 보고한 것도 있다. 북경에서는 정보입수가 어렵게 되자 청나라 하급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자료를 얻기도 한다.그런데 한범석과 일행들이 북경에 도착했지만 오히려 청나라 예부는 한범석과 일행을 의심했다. 선발대가 이렇게 사은사보다 먼저 온 것이 당황스럽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범석 일행은 예부관원들과 한 차례 갈등을 겪게 된다. 당시 황제는 도성에 있지 않고 薊州와 永平 등지에서 사냥을 하며 지역을 시찰하고 있었다. 한범석이 얻은 정보는 당시 조선과 청나라의 상황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특히 三藩의 난 이후에도 청나라에 크고 작은 규모의 전란이 있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점이 크다. 한범석의 선발대는 다른 목적을 가지지 않고 당시 정세 파악에 주력하였으므로 그의 장계는 정치와 종교의 변화에 자세하다. 朱氏 후손을 세워 멸망한 명나라 왕조를 재건하려는 세력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최고 산문 중의 하나인 열하일기의 「허생전」을 보면 북벌에 대한 삼대책을 허생이 이완장군에게 언급하는 내용이 있다. 朱氏왕손을 세운다거나 자제들을 빈공과에 보내고 강남에 상인을 보내어 북벌을 도모한다는 내용이다. 「허생전」은 허구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지만 소재가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을 한범석의 장계를 통하여 거듭 확인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