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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904년, 일본해군은 러일전쟁 개전 때부터 러시아 여순(旅順)함 대 공략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 때문에 러시아 블라디보 함대가 가령 방비가 약한 홋카이도(北海道)를 위협해도 쓰가루해협 (津軽海峡)을 경비하는 정도로 하고, 오타루(小樽) 등은 그들의 마 음대로 시켜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예측대로 개전하자 마자 블라디보함대는 쓰가루해협 근처로 출격해 상선을 격침하였 다. 이 때문에 홋카이도 마쓰마에 주민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한편 강원도 원산에서는 블라디보함대에 의해 수송선 긴슈마루 (金州丸) 등이 격침당하고 198명이 포로로 되는 등 피해가 컸으며, 일본해군은 블라디보함대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서 일본해군은 러시아의 의도대로 여순에서 가미무라(上村) 제2함 대를 빼고 블라디보함대 대책으로 충당하였다. 한편 강원도 원산에서는 블라디보함대에 의해 수송선 긴슈마루 (金州丸) 등이 격침당하고 198명이 포로로 되는 등 피해가 컸으며, 일본해군은 블라디보함대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서 일본해군은 러시아의 의도대로 여순에서 가미무라(上村) 제2함 대를 빼고 블라디보함대 대책으로 충당하였다. 일본해군은 머지않아 블라디보함대가 남하해 대한해협, 쓰시마 해협에서 일본군 보급로를 위협할 것을 예상하고, 동해에서의 적함 감시 체제의 강화를 도모하였다. 이 일환으로 영일만, 울릉도, 독도에 망루를 세우고, 울릉도에는 무선전신소를 두고 독도 망루 와 해저전선으로 연결할 방침을 세웠다. 그즈음 여순에서는 일본 전함 2척이 기뢰에 건드려 침몰해 전력 이 저하하였다. 이를 계기로 블라디보함대는 쓰시마해협에 출격해, 방심하고 있었던 일본 수송선 히타치마루(常陸丸), 이즈미마루(和泉丸) 등을 격침해 일본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더 나아가 블라디보함대는 대담하게도 쓰가루해협을 지나서 도교(東京)만 앞 바다까지 출격해, 각지에서 전략물자 등을 운반하는 상선을 격침 하였다. 함대의 출격 목적은 미국으로부터 가져오는 200만 파운드 의 전비를 노린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블라디보함대의 종횡무진의 활약도 울산 앞바다에서의 해전으로 끝이 났다. 순양함 1척을 잃고 나머지 2척은 손상을 입었다. 그러 나 블라디보함대의 위협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게다가 유럽에서 러시아 발틱함대가 제2태평양함대로 재편돼 극동으로 파견될 예정 이다. 일본군은 동해에 있어서 적함 감시 체제의 강화를 서둘렀다. 울릉도에는 망루 2개소가 설치되고 경상북도 죽변에 해저전선으로 연결되었다. 이 무렵 오키에 사는 어부 나카이 요자부로(中井養三郎)로부터 ‘리양코도 영토편입 및 임대 청원서’가 제출되었다. 내무부는 리양코도가“한국 영지로 의심 된다”고 해 반대하였다. 이에 반 해 외무성 야마자 엔지로(山座圓二郎)는 오히려“시국이야말로 그 영토편입이 긴요하다”고 나카이에게 청원서를 외무성에 회부하도 록 지시하였다. 야마자는 독도의 군사적 가치 및 열강국간의 파워 포리틱스를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의견이 중시되어 독도 는 1905년 2월에 일본영토로 편입되었다. 이 해 5월 27일에 발틱함대는 쓰시마해협을 통과하자 일본 연합 함대와 격돌하였다. 결과는 일본군의 대승리였다. 다음 날 북쪽으 로 도망가려던 러시아 주력 함대는 울릉도・독도 근처에서 일본군 에게 대패해, 지휘관은 항복하였다. 독도해역은 발틱함대의 종언의 바다로 되었다. 이 해전의 결과 울릉도・독도의 군사적 가치는 더높아지고 울릉도 동북부에 망루가 1개소, 독도에 1개소 세워졌 다. 이것으로 동해에서의 적함 감시의 공백 지대는 해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