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몇 연구들은 지역 간 교육격차를 설명하는 원인의 하나로 인구이동에 주목하고 있다. 본 연구의 목적은 대도시내에서 학업성취도의 지역적 차이와 학령인구 이동과의 관련성을 파악하고, 인구이동이 어떻게 지역의 인구구성, 교육환경, 주택시장에서의 변화와 연결될 수 있는지를 논의하는 것이다. 대구를 사례로 분석을 수행하였고, 주요 분석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학교급에 상관없이 지역 간 학업성취도의 차이가 나타났으며, 영어와 수학 과목에서 두드러졌다. 둘째, 학업성취도는 공간적 군집경향을 보였으며, 이러한 경향은 학교급이 올라가면서 보다 뚜렷해졌다. 셋째, 초등학교 저학년(8~10세)의 순이동률이 학업성취도와 가장 높은 정적인 상관관계를 보였고, 정적인 상관관계는 초등학교 고학년(11~13세)까지만 나타났다. 넷째, 학업성취도와 학령인구 이동은 양방향적 관계를 보이며, 인구이동은 지역의 인구구성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교육서비스와 주택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켜 지역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선별성이 강화된 새로운 인구이동을 유발한다. 즉 교육격차와 인구이동은 순환누적 과정을 보인다.
점필재 김종직은 조선초기 사림의 종사이다. 그가 조선조 도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것은 그 자신이 문학과 학문에 있어서 탁월한 성취를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을 통하여 인륜 도덕을 숭상하는 사회 기풍을 일으키는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주었고, 그 문하에 도학의 이념을 실천하는데 앞장선 훌륭한 후학들을 양성해내었기 때문이다. 점필재의 도학 이념에 입각한 정치 교화와 교육의 실천 모범은 그가 지방관으로 근무하였던 10년 동안에 가장 잘 나타난다. 이런 관점에서 이 글에서는 점필재가 함양군수로 봉직하였던 5년 동안의 시문 가운데 정사를 임하는 태도와, 풍교의 대책과 강학 및 유상의 정서를 추적하여, 점필재의 평소 학문 사상과 정치 교육의 성과가 조선전기 도학의 선구임을 밝히고자 하였다. 점필재는 함양군수로 부임하면서부터 수시로 관내를 순시하면서 지역의 역사와 물산, 홍수의 재해, 조세와 부역 등, 民生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었고, 함양읍성 나각을 보수하고 다원을 경영하는 등 조선초기 지방관원으로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고을 주민의 편익을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강구하여 시행하였다. 그는 또한 향교를 보수하고 향교를 중심으로 향음 향사 양로의 의식을 거행하여 인륜 도덕으로 풍속을 순화한다는 風敎의 실현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한편으로 많은 문생들을 받아들이고, 그 문생들과 고을 주변의 산천을 다니면서 수시로 학문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도학과 심학의 단서를 열어주었다. 점필재는 함양군에서 시행한 시정과 풍교 강학의 규범은 이 시대 학자들에게 도학 정치 실현의 한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재들은 조정의 관료나 재야의 문인 학자로서 그의 모범과 신념을 널리 확산함으로써 한 시대의 새로운 조류를 형성하였다. 그런 점에서 함양은 점필재 김종직의 학문 사상과 경륜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 조선조 도학의 본류를 형성하는 전환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