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제국주의 일본이 불법적으로 독도편입을 시도한 1905년 전후 일본 사료에 나타난 울릉도·독도에 대한 지리적 인식을 검토하고, 이를 통하여 일본의 왜곡된 독도영유 권 주장의 실태를 재확인하고자 한다. 1905년 일본의 불법적 독도편입 조치와 함께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의 본질은 그 출발점이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침탈 야욕에서 발생하였다는 점이다. 즉 1904년 발발한 제국주의 국가인 러.일 양국 간의 전쟁 수행과정에서 일본이 독도를 불법적으로 편입하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근 세.근대기 일본 고문서에 나타나는 혼란된 지리적 인식은 1905년을 전후한 시기에 눈에 띄게 줄어든다. 이미 서양의 근대적 과학기술을 앞서 수용한 일본은 근대적 측량법 덕택으로 경위도나 거리를 큰 오차 없이 정확히 측정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위도 위치나 거리 측정은 울릉도·독도에 대한 지리적 인식을 보다 정확하게 가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지리적 인식의 정확도보다 울릉도·독도의 명칭을 어떻게 확정할지가 더 큰 관건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러일전쟁은 이러한 명칭혼란을 종식시키고 독도를 죽도(다케시마)라는 명칭으로 부를 수 있도록 하는데 기여하였다. 그것은 일본이 러일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전략적 필요성에 의해 독도를 불법 편입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독도는 제국주의 일본의 영토팽창 정책 속에 ‘죽도(다케시마)’라는 원치 않는 이름으로 불법적으로 편입된 일제강점기의 첫 번째 희생물이 된 것이다.
이 논문의 목적은 근세 일본의 사료에 나타난 울릉도 · 독도에 대한 지리적 인식을 중심으로 그들이 말하는 다케시마(울릉도)와 마쓰시마(독도, 우산도, 자산도)가 한국의 영유임을 재확인해보는 것이다. 일본이 17세기 고유영토설의 근거 사료로 삼고 있는 『죽도기사』의 곳곳에서 이미 울릉도와 우산도가 조선의 역사지리서에 기술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음을 볼 때, 일본은 이미 17세기 이전부터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이 영유하고 있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죽도고』에서도 역시 오야와 무라카와 집안이 80년간 울릉도에서 불법적인 어로활동을 한 사실만을 가지고 자신들이 되찾아야 할 섬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인식으로 지적할 수 있다. 왜구의 노략질로 고통 받던 울릉도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섬을 비워둔 것을 사람이 살지 않는 폐도라고 하면서, 잠시 동안 그곳에서 어로활동 한 것을 핑계로 자신들이 되찾아야할 섬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의 ‘다케시마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10가지 포인트’ 중 <포인트 3>의 ‘17세기 고유영토확립설’ 주장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원록각서(元祿覺書)』에서 안용복 일행이 타고 온 배에 걸린 「조울양도감세장 신 안동지기(朝鬱兩島監稅將 臣 安同知騎)」라고 쓰여진 깃발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바로 안용복이 울릉도 · 독도가 조선의 영유임을 일본 측에 선포하는 강력한 의지가 담긴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울릉도와 우산도(자산도) 양도의 감세장을 칭하며 죽도(울릉도)의 조선영유를 당당히 확인하기 위해 도일한 것임을 가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근세 울릉도 · 독도 관련 일본사료에 나타난 지리적 인식의 특징을 보면, 조선에서 울릉도 · 독도까지 거리를 실제보다 훨씬 더 가까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원록각서』와 『죽도기사』에서 안용복의 진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죽도고』를 편찬한 오카지마는 오히려 조선에서 울릉도 · 독도까지의 거리가 더 가까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울릉도 · 독도가 조선영토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공간적 거리보다 인식적 거리가 훨씬 가까웠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근세 일본의 사료에 대한 검토, 특히 ‘울릉도 · 독도의 지리적 인식’에 대한 검토는 일본 측의 ‘17세기 다케시마 고유영토설 주장’을 비판하기 위한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