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에 등장했던 독일 경건주의 운동을 그 의도와 지향점에서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즘과 유사점을 구명해 보려는 시도였다. 종교개혁이후 도그마 중심의 교조적인 정통주의를 비판함과 동시에 막 대두되고 있던 초기 계몽주의에 내재된 이성절대주의의 한계성(혹은 위험성)을 경계하면서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측면에서 신앙(영성)의 고 유한 영역을 확보하고자 했던 당시의 경건주의자들에게서 계몽주의 이후 이성적 합리성과 객관주의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새로운 영성을 형성하고 자 했던 종교적 포스트모더니즘과 유사점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 하면, 종교적 인식론과 새로운 영성의 관점에서 경건주의와 오늘날의 포스 트모던 관점과 유사한 점이 있음을 구명했다. 더욱이 낯선 타자와 사회적인 약자와 주변인들에 대한 윤리적 책임과 환대를 강조하는 데리다나 레비 나스 같은 포스트모던주의자들과 회심한 이후 필연적으로 ‘이웃사랑’을 성화의 핵심 내용으로 삼았던 A. H. 프랑케와 같은 경건주의자들 사이에는 그 의도와 지향성에서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또한 경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하게 된 사회적 상황에도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경건주의는 종교개혁이후 교파간의 갈등과 대립이 심화되던 서구 기독교 사회에 총체적인 위기와 파국을 가져온 30년 전쟁에 대한 신앙적인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19세기 말엽 서구 문명의 총체적 위기와 몰락을 예감한 니체 같은 예언자적 인물에서 시작하여, 세계 1, 2차 세계 대전과 전체주의의 야만적 폭력과 폐해를 통해 이성 절대주의와 낙관적인 역사관에 대한 절망과 회의 속에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대항 문화적 성격으로 대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경건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 기독교 세계의 사회적 위기와 사상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대안적 시도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논문의 목적은 독일 경건주의가 독일 문학의 최고봉으로 여겨지는 요한 볼프강 괴테(1749-1832)에 끼친 영향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경건주의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가 대학생활을 하며 병을 얻었던 라이프치히에서 고향인 프랑크푸르트로 돌아 왔을 때, 그는 어머니의 친구 인 클레텐베르크 부인과 프랑크푸르트 근교에 살던 경건주의자들에 의해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자유롭고, 감각적이며 영감어린 종교적 체험을 하였다. 특별히 이 시기에 괴테는 친젠도르프가 세운 헤른후트 형제단 회 원들과의 강렬한 만남을 가졌다. 처음에 괴테는 그들에게 매료되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과의 신 학적인 입장의 차이로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특히 인간의 원죄를 긍정하 고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그들의 입장에 괴테는 동의할 수 없었다. 이러한 괴테의 입장은 그들에 의해 이단적인 펠라기우스주의란 정죄를 받았다. 마 음의 큰 상처를 입은 괴테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하던 중 아 버지의 서재에서 아놀드의 불편부당한 교회와 이단의 역사를 발견하고, 여기에서 자신의 종교적인 입장의 정당성을 확인하였다. 그는 당대의 기독 교회가 교권에 의해 교리화되고 제도화 되면서 초대 교회가 지녔던 신앙의 생동력을 상실했다고 보았다. 그는 신앙이란 결국 각자의 신념의 문제로 파악하고, 특정한 기독교 신앙 전통에 매이지 않고 담대하게 자신의 길을 나아갔다. 아놀드의 저서의 영향은 괴테의 문학 이곳저곳에 배어 있는데, 특히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어떤 지역의 목사가 어떤 지역의 신임 목사 에게 보내는 편지」, 「두 가지 중요한, 이제까지 해명되지 않은 물음들」, 그 리고 「영원한 유대인」이다. 괴테는 아놀드의 교회사적인 맥락에서 도출된 개념과 모티브를 다른 삶의 영역과 작품에 적용하고 일반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