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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后山許愈(1833-1904)의 文學思想에 대해 고찰한 글이다. 후산이 활 동한 19세기는 勢道政治에 따른 민란과 일본을 위시한 서구 열강들의 침략으로 성리학적 통치 이념과 가치관이 근원적으로 위협받고 있었다. 후산은 이러한 內憂外患의 시대적 변화 속에서 한평생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서 학문탐구와 인재양성에 전념하였다. 그가 행한 학문적 사업은 正學을 수호하고 異 端을 물리치는 것이었으며, 나아가 인조반정(1623) 이후, 침체된 경상우도의 학풍 을 진작시키는 일이었다. 그 결과 후산은 공자․주자․퇴계, 그리고 寒洲李震相 (1818-1886)으로 내려오는 主理的학문의 전통에서 스승인 한주가 내세운 ‘心卽 理’설을 자신의 학문의 귀결처로 삼아, 어려움에 처한 시대적 상황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南冥을 비롯하여 이 지역 출신 및 연고가 있는 스승 선배 학자들 의 문집간행과 현장에서의 강학을 통해 지역의 학풍을 진작시키는 일에 심력을 다 하였다. 한편 후산은 일찍부터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아 왔으며, 특히 맹자 이후, 쇠퇴해 진 유학을 일으키고 六朝시대의 쇠약해진 문풍을 일으킨 韓愈의 문장을 좋아하였 다. 그렇지만 후산은 문장가의 입장에서 문학을 바라보지 않고, 시종일관 학자적 관점에서 문학을 바라보았다. 그 결과 후산은 학문과 인격에 기반 한 건실한 내용 의 문장, 즉 ‘世敎’에 도움이 되는 문장을 추구하였으며, 그 문장은 바로 이치를 밝히는 ‘明理之文’이었다. ‘명리지문’의 구체적 내용은 主理的전통 속에서 正學 을 수호하고 時文인 科擧之文과 俗學인 異端之學을 물리치는 것이었으며, 문체 적 특징도 내용에 걸맞게 화려한 수사적 표현을 배제하고, 담박하고 자연스러운 문체를 선호하였다. 후산은 이처럼 정통 성리학자들이 추구한 문학사상의 기반위에 있으면서도, 나름 대로 19세기가 처한 시대현실을 반영하기도 하였다. 우선 후산은 문장에 대해 일 정한 효용적 가치를 인정하였으며, 나아가 도가 담고 있는 내용도 성리학적인 내 용뿐만 아니라 현실적․실용적인 내용을 다소 포함하고 있어, 문장의 내용상의 외 연을 넓히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특기할 점은 도와 문의 상호관계에서 후산은 도가 들어갈 자리에 ‘理’를 배치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명리 지문’을 추구한 그의 문장학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한평생 정통 理 學을 추구해 온 학문경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후산이 추구한 문학사상은 영남학풍의 학문적 전통을 수용하면서도, 자신이 처한 지역 적․역사적 입장에서 나름의 문학사상을 견지해 나갔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200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后山許愈(1833-1904)가 살았던 조선말기는 李震相․朴致馥․趙性家․金麟 燮․崔琡民․鄭載圭․金鎭祜․郭鍾錫등이 진주 인근에 포진하여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학문적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후산은 李滉․金誠一․李玄逸․李 象靖․柳致明의 학맥을 이은 李震相의 문인이므로 외견상 퇴계학맥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10대조는 南冥曺植(1501-1572)의 門人이고 9대조와 8 대조는 모두 남명 私淑人이어서, 후산은 태어나면서부터 남명학파의 학문적 전통 을 이미 이어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겉으로 남명학파는 사라지고 퇴계학파와 율곡학파의 학문이 강우 지역에 깊이 젖어든 이때, 후산이 남긴 神明舍圖銘或問이란 글을 중심으로, 남명학파의 후 예로서 그가 추구하였던 남명학 계승 정신과 그 의의에 대해 살펴보았다. 후산이 1889년에 신명사도명혹문 이란 글을 지은 것은 남명 학문의 핵심을 闡 發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비록 이진상의 문인으로 서 퇴계학맥에 해당하면서도, 자신의 선조가 대대로 남명학파였기 때문에 자신이 당대의 남명학파 중진 학자들의 견해를 집대성하여 이 글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후산은 이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광범위하게 수집하 려 노력하였고, 이를 수용하거나 수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거나 간에 이를 오직 논리에 따라 해결하려 하였다. 특히 쟁점이 되었던 부분은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 될 수 있다. 첫째는 神明舍銘註說의 刪削문제이다. 둘째는 神明舍圖교정 문제이다. 셋째는 신명사명 ‘動微勇克' 아래에 있는 自註‘閑邪'의 해석 문제이다. 넷째는 신명사도 의 ‘國君死社稷'의 의미 해석 문제이다. 다섯째는 신명사도 하단 止圈좌우의 ‘必至․不遷'의 위치 문제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학자들 사이에 첨예하게 대립되는 견해가 있기도 하여 매우 번 다하고 수용하기 어려운 일이었음에도 후산은 발표한 지 1년이 지난 1890년 무렵 에 이를 거의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후산은 남명의 노장적 면모보다 는 성리학적 면모를 드러내려 하였고, 이는 자신이 퇴계학맥을 이은 학자이면서 남명학파이기도 하다는 데서 학문적 절충을 시도한 것으로 이해된다. 또 후산의 이러한 노력이 가져다 준 부수적 효과는 남인 학자들과 노론 학자들 사이에 남명 학파적 유대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1930년대 단성 지역에서 진행 되었던 남인과 노론 학자들 사이의 年例討論모임이 이루어진 것과 무관하지 않 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