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조선초 향교교관 정책의 난맥상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조선 건국초에 주자학으로 무장된 신흥 사대부들은 이상적 유교사회를 건설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중국의 삼대(三代)처럼 학교를 완비해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향교를 급속하게 확대 설립해 나갔다. 그러나 향교교관으로 임명할 인적 자원의 확보나 교관에게 지급할 재정의 확보 등의 대책은 너무나 부실했으며, 여기에다 교관을 경시하는 풍조와 외관직을 기피하는 경향 등 향교교관 정책을 펼치는 데 당시의 조건들은 녹록지가 않았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당시 향교교 관직은 교직, 외관직, 무급직이라는 약점 외에도 천전(遷轉)이나 승직(陞職)이 힘들었던 그야말로 최악의 조건을 지닌 자리였던 것이다. 이렇게 기피직이었던 향교교관을 확보하기 위해 국가에서는 흠결이 있는 문신(文臣)을 교수로 파견하거나, 피역(避役)이 목적이었던 유학(幼學)들로 하여금 훈도(訓導)·교도(敎導)·학장을 삼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 보니 이들은 대체로 교육에 대한 의욕이나 능력이 부족하여 실질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교관들에 대해 신뢰를 하지 못하는 풍조가 만연되어 향교를 기피하려 하였다. 이처럼 조선초에 향교의 증설은 시대적 당 위로서 어쩔 수 없었으나, 이것은 교관 확보가 가능한지에 대한 고민이 결여된 채 이루어진 무모한 정책이었다. 결국 이로 인하여 조선초부터 향교교육이 지속적으로 부진을 면치 못하다가 조선 중기에 이르러 거의 폐절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