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김천 김공폭 암각바둑판을 사례로, 암각바둑판의 의미와 입지 및 장소정체성을 고찰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결과를 도출하였다. 암각바둑판이 새겨진 장전폭포일대는 예로부터 수도암에서 가야산 해인사에 이르는 길목의 승경으로 회자되어 왔다. 수도산에서 발원한 수원(水源)이 장전폭포를 거치는 대가천과 남쪽의 황점 및 장전리에서 비롯된 목통천이 무흘구곡 제6곡인 옥류동 옥류천에 합류된다. 추가 발견된 암각바둑판은 계류형 암각바둑판의 전형적 입지로서, 화강암 협곡과 너럭바위 등의 지형경관이 탁월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옛 선비들의 풍류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이 재차 확인되었다. 만폭 암각바둑판의 크기는 46.0×46.5㎝, 기반암의 크기는 3.0×1.6m 이었으며 높이는 0.7m였다. 바둑판 상부에 "晩"이라 기재되어 있고 대국방향을 장축으로 한 좌향은 NW-SE로 나타났다. 추가 발굴된 김천의 암각바둑판의 명칭은 폭포 상단에 크고 깊게 음각된 '만폭(晩瀑)'이라는 폭포명과 암각바둑판 상단에 이에 조응(照應)하여 새겨진 '晩' 등을 반영하여 '김천 만폭 암각바둑판'으로 명명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만폭 암각바둑판 주변의 바위글씨로 볼 때 폭포의 이름은 만폭을 비롯하여 '수렴폭(水濂瀑)', '귀이폭(歸異瀑)' 등의 이명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폭포수의 상류에서 물을 공급하는 수원은 '원천(源泉)', 떨어지는 폭포수를 담는 못은 '지일담(知一潭)'이며 폭포 하단을 에워싸고 있는 벼랑은 '운금벽(雲錦壁)' 등의 경물명을 부여함으로써 일정한 의미를 설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만폭 암각바둑판의 조영자는 주변에 각자된 4인명의 바위글씨로 보아 수원 백씨 등이 조성 및 향유주체가 되어 구한말 이후 20C 초반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바위글씨와 주민 증언을 통해 볼 때 수원 백씨 이전 이곳은 원림경영 등에 대한 별도 주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됨에 따라 계속적인 보완 연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