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仁弘의 晦退辨斥은 광해군 초에 실현된 五賢從祀에 대응한 것이었다. 오현 종사는 선조초 金宏弼, 鄭汝昌, 趙光祖, 李彦迪 등 四賢에 대한 종사 요청을 그 연원으로 하고 있었다. 이 중 이언적은 乙巳士禍 때의 행적으로 인한 혐의에도 불구하고 그의 학문적 성과에 대한 李滉의 평가에 힘입어 종사 논의에 포함될 수 있었다. 이러한 기반에서 이황을 포함한 오현종사는 東方의 道統을 설정하 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선조는 즉위 초 사현종사를 수용하지 않는 대신 이들의 행적을 수집 정리한 國朝儒先N을 편찬함으로써 이들이 담지한 도통의 구도를 일정하게 인정하 였다. 그러나 재위 후반 신하들의 국왕에 대한 태도에 대한 문제의식이 강화되 면서 이언적과 이황을 강도 높게 비판하였고 오현종사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 론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광해군은 즉위 초 公論을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려는 정치적 선택에 따라 오현종사를 실행하였다. 정인홍은 이에 대응하여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 종사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 다. 그의 회퇴변척은 程朱學이 설정하고 있던 道統論을 조선에 적용시키는 논 점에서 전개되는 것이었다. 정인홍은 변척 과정에서 朱子와 관련된 사례를 적 극적으로 원용하였다. 주자가 孟子와 顔子를 변론한 것과 陳建이 주자를 변론 한 것은 결국 주자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도통의 학문적 실천으로 평가될 수 있 는 것이었다. 정인홍은 이를 동방 도통에 적용하면서 학술적 성과보다 도학의 실천적 측면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오현종사 논의에서 김굉필과 조광조는 이러한 기준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편 적으로 인식되었지만, 이언적의 경우 정치적 혐의에도 불구하고 이황의 인정에 힘입어 종사될 수 있었다. 이것은 학술과 행적 모두에서 이황에게 集大成의 의 의를 부여하는 토대가 되었다. 정인홍은 이러한 구도에 부당함을 느끼고 도학 의 실천적 측면에서 도통의 일원적 설정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경학적 측면에서 보면 中庸의 요체를 時中으로 이해하는 데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는 顔子의 은거를 時中의 道에 부합한 것으로 인식하였고, 그 연장에서 曹植의 위상을 규정하였다. 그리고 조식을 조광조와 정여창에 대한 평가와 연결함으로써 出處에 대한 엄격한 평가를 통해 도통이 설정되어야 한다 는 원칙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원칙을 통해 이언적과 이황은 時中의 道에 어긋 난 사례이며, 따라서 문묘 종사는 부당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