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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月川 趙穆(1524-1606)의 『月川集』 필사본과 간행본의 내 용을 비교하여 개정의 특징과 의의를 고찰한 것이다. 『月川集』은 조목의 아들 趙錫朋이 간행을 주도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시 950여 수를 비롯해 필사본에 수록된 다수의 작품이 산삭되었다. 산삭의 양상을 살펴보면 특징적으로 류성룡과 관련된 민감한 작품들이 산삭되었는데, 이는 ‘主和誤國’의 내용을 지우려는 김응조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 영향력은 문집의 서문을 수정하고 言行記와 더불어 혐의가 될 만한 다수의 작품이 산삭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만사ㆍ제문의 경우, 조목의 도산서원 종향을 추진했던 문인의 작품은 수록하고, 그렇지 않은 인물의 작품은 산삭되었다. 시에서는 남명학 파의 권역에 있는 인물을 숨기거나 정인홍을 의도적으로 폄하한 흔적이 보였고, 그 중 儒家에 유익하다고 판단된 시는 제목을 변경해서 간행 본에 수록하였다. 이상의 특징을 종합하여 『월천집』 개정이 외부의 영향과 간섭을 받으면서 진행되었고, 상대적으로 조목 문인들은 이에 대응할 자체적인 기반이 약한 상황이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2.
        2018.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月川學團의 초기 성격을 살피기 위해 조목의 합천지역 교유인물과 조목에 대한 도산서원 종향 과정을 고찰한 것이다. 조목은 1598년 1월부터 2년 5개월 동안 합천 군수로 재임하면서 지역 학자들과 교유하였는데, 합천이 來庵 鄭仁弘의 지역적 기반이었던 만큼 정인홍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교유가 이루어졌으며, 특히 조목이 尤谷齋에서 『心經講錄』을 강학하면서 이 지역에 퇴계의 학문이 전수되기도 하였다. ‘조목과 정인홍 문인들의 친연성을 월천학단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였는가’하는 문제는 󰡔월천집󰡕 판본 비교를 통해 그 대략을 확인할 수 있다. 초고에 해당하는 필사본과 1666년 간행본의 내용을 비교‧검토해 보았을 때 필사본에 수록된 합천과 관련된 기록들이 간행본에는 모두 산삭되어 있었다. 더구나 간행본에는 남명을 추모하는 내용의 「聞曺南冥訃」가 산삭되고 정인홍을 강도 높게 비판한 「偶見仁弘南冥集跋語」가 수록되었다는 점에 주목하면, 간행본의 정리 과정이 정인홍과 그 문인들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에서 진행되었으며 이와 반대로 초기의 필사본은 수용의 입장에서 정리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한편 조목 사후에 그를 도산서원에 종향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啓請과 종향·배향에 대해 향촌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종향이 지연되다가 金中淸이 조정에 나아가 직접 啓請을 준비하면서 빠르게 추진되었다. 때문에 종향을 비판하는 일부 인사들은 대북파의 지원이 있었다고 의심했지만, 또한 그것을 확신하지는 못했다. 이 글에서는 대북파와 대립 없이 종향이 공론화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정인홍의 문인들과 친연성을 보이는 조목의 교유활동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정리하면, 조목 사후 초기에 조목의 문집을 정리했던 문인들은 조목과 정인홍 문인들과의 친연성을 수용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종향을 추진하여 대북정권 내에서 무리 없이 공론화 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