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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木溪 姜渾(1464-1519)은 중종반정에 참여한 靖國功臣으로, 홍문관 대제학 과 이조ㆍ공조ㆍ형조 판사를 두루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특히 그의 시 는 晩唐의 체를 얻어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일컬어졌으며, 그는 뛰어난 문장과 인품으로 뭇 선비들은 물론 성종에게도 촉망받던 인재였다. 그러나 연산조 말 승지로 있으면서 응제시로 아부하여 부귀를 탐한 간사한 인물이라는 오명을 얻 었고, 이로 인해 사림에게 배척 받은 것은 물론 그의 문집도 제대로 간행되지 못하였으니, 그의 저술은 백에 하나도 남아 있지 못한 실정이다. 그러나 여러 증언과 정황을 고려해 볼 때, 강혼이 연산군 밑에서 벼슬하고 글 을 지은 것은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으며, 그에 대한 비난도 매우 편향적이고 부당한 면이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강혼의 생애와 사상 및 그의 문학은 재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강혼은 훈구에 속하는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김종직을 스승으로 섬기고 그 제자들과 두루 사귀었다. 이러한 점을 반영하듯 그 당시 훈구와 사림이 첨예하 게 대립한 昭陵復位論과 薦擧別試制(賢良科)를 통해 볼 때, 강혼의 정치적 입지 木溪 姜渾(1464-1519)은 중종반정에 참여한 靖國功臣으로, 홍문관 대제학 과 이조ㆍ공조ㆍ형조 판사를 두루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특히 그의 시 는 晩唐의 체를 얻어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일컬어졌으며, 그는 뛰어난 문장과 인품으로 뭇 선비들은 물론 성종에게도 촉망받던 인재였다. 그러나 연산조 말 승지로 있으면서 응제시로 아부하여 부귀를 탐한 간사한 인물이라는 오명을 얻 었고, 이로 인해 사림에게 배척 받은 것은 물론 그의 문집도 제대로 간행되지 못하였으니, 그의 저술은 백에 하나도 남아 있지 못한 실정이다. 그러나 여러 증언과 정황을 고려해 볼 때, 강혼이 연산군 밑에서 벼슬하고 글 을 지은 것은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으며, 그에 대한 비난도 매우 편향적이고 부당한 면이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강혼의 생애와 사상 및 그의 문학은 재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강혼은 훈구에 속하는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김종직을 스승으로 섬기고 그 제자들과 두루 사귀었다. 이러한 점을 반영하듯 그 당시 훈구와 사림이 첨예하 게 대립한 昭陵復位論과 薦擧別試制(賢良科)를 통해 볼 때, 강혼의 정치적 입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