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초기 왕도(王都)인 졸본의 오녀산성은 평지에 있는 중국의 도성(방어성이자 도읍 성)과는 달리 산 정상부에 위치해 있다. 고구려는 산성을 방어성이자 치소성으로 삼아서 중 국의 침략에 대항하며 그 효율성을 증명하며 국세를 펼쳐 나갔다. 고구려 왕도 연구는 일본 인 학자들이 20세기 초에 주로 많이 하였는데 그들의 연구는 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14년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는 그의 논문에서 고구려 도성은 평상시 거주하는 평지성과 비상시 들어가 농성하는 산성의 세트로 이루어졌다는 이론을 제시하였는데 이 설은 한국과 일본과 중국 학자들 사이에서 100여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통설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근 래에 여러 한국의 신진 학자들에 의하여 세키노 다다시의 고구려 왕성의 평지성-산성 세트 론에 대한 의문과 비판이 여러 번 나왔다. 양시은(2021)은 이러한 도식화된 이론의 시작과 정착과정 및 어떻게 일본, 중국, 한국의 학자들이 이 이론을 수용하게 되었는지를 체계적으 로 토의한 뒤, 산성과 평지성의 세트이론은 재고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일반 시민을 위한 한국사 서술이나 다른 학술 논문에서는 이 산성과 평지성의 세트 이론이 보편화 되어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이 논문은 고구려의 왕도는 산성과 평지성의 세트가 아니고, 산 성에서부터 시작하였고, 산성을 위주로 하여 외부 침략을 방어하고 나라를 경영하였다는 것 을 다음 다섯가지 고구려 왕도의 특징을 들어 검토하고자 하였다.(1)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산성이 주로 제1차적인 왕도이었다.(2) 고구려에서 왕도로서의 산성은 토속신앙 적 성지聖地이자 성전聖殿이었다.(3) 뉴질랜드 마오리 문화의 목책성(木柵城)과 비교해 보 면 한 부족이 대체로 목책으로 요새화된 성 하나를 방어성이자 거주성으로 하고 나머지 인구 는 목책성 주위에 방어벽이 없는 마을에 흩어져 살다가 위험시(외부 침략이 있을 때) 목책 요 새지에 들어가 함께 농성하였다.(4) 고구려의 외국침략자에 대한 방어 전술이 청야입보淸野 入保-게릴라전술이었는데 이러한 전술에는 산성이 평지성보다 더 큰 이점이 있었다.(5) 근 래 많은 고고학적 산성의 발굴 결과는 고구려의 산성-평지성 세트 방위체제를 뒷받침하지 않는다. 졸본에는 아예 평지 왕성이 없었고, 그 다음 고구려의 수도 두 곳(집안, 평양) 모두 왕 도가 산성에 위치해 있다가 힘이 축적되고 필요를 느꼈을 때 평지성을 쌓아 왕도의 역할을 분담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산성이 곧 방어성이자 치소성(도성)의 역할을 하였다.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의 평상시 거주하는 평지성과 비상시 들어가 농성하는 산성이란 세트이론은 받아 드릴 수 없 다. 여기에 뉴질랜드 마오리 문화의 목책방어성과 고구려 산성의 비교연구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