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클린 올링거(Franklin Ohlinger,중국명:武林吉)는 미북감리교 (Methodist Episcopal Mission, 여기서 M.E.M의 중국식 표현으로 미이미회 (美以美會)라 지칭했다.) 소속 선교사로서 한국선교의 초기 북감리교 선교 정책에 영향을 미칠 뿐 만 아니라 문서선교로도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의 짧은 한국선교(1887-1893), 5년8개월의 시기에 비추어 그의 사역을 평가하 는 면도 있겠지만 그의 생애 대부분을 차지했던 중국선교(1870-1887, 1895-1911)에 대한 연구는 한국기독교사연구에 올링거를 통전적으로 이해 하는 기초라고 볼 수 있다. 이에 필자는 그가 한국선교를 시작하기 전 18 년동안 중국 복주(福州,Fuzhou)에서 활동한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 그를 다 시 평가하고자 한다. 북감리교의 복주선교를 통해 직접적인 선교뿐만 아니 라 출판과 교육에 중점을 두고자 한 선교정책을 이해해 보며, 올링거와 뗄 수 없는 영화서원의 성립 등을 통해 그의 교육선교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 를 풀어가고자 한다. 특히, 영화서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중∙영문 이중언 어교육 논쟁을 통해 당시 선교와 교육의 문제에 대한 북감리교 선교사들의 목소리를 경청해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선교사들은 전문적인 영어교육이 중국신도의 자존감을 고양시킬 뿐만 아니라 현지기독교인과 함께 만들어 가는 선교이양의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반면 이와 다르게 영어교육이 선교의 세속화를 촉진할 뿐만 아니라 물질주 의적인 취향이 농후한 중국신도가 신앙문제보다 영어를 통한 직업적 성공 에 더 몰두할 수 있다고 여겨 영어교육을 선교의 장애물로 보고 염려했다. 이점은 분명 올링거의 영화서원 이중언어교육에서 발단이 된 것으로 올링 거 이해의 중요한 기초가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