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朝鮮王朝實錄을 기초 자료로 삼아 15세기 명나라 사신의 서화 교류의 구체적인 발생 양상을 분류하여 정리하였고, 題畫詩및 題 跋⋅記文등 문헌 자료에 근거하여 서화 교류가 문학 교류⋅우호 외교⋅ 문화 수출 분야에 담당하였던 역할을 밝혔으며, ‘朝中文化交流史’ 및 ‘東 亞藝術史’의 각도에서 15세기 명나라 사신의 서화 교류의 특징과 의미를 고찰하였다. 우선, 15세기 朝鮮使行중 서화 교류의 구체적인 발생 양상은 주로 作 畫留書⋅禮物贈受⋅請書請畫세 가지로 분류된다. 일부 書畫에 능한 명나라 사신은 朝鮮을 방문하는 동안에 서화의 재능을 펼쳐 적극적으로 서화 교류에 나서는 동시에 조선 문인과 詩文唱酬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서화 교류의 결과물, 즉 그림과 글씨는 詩文唱酬의 대상이 되었고 한시는 당시 서화 교류의 형태를 기록하였다. 15세기 명나라 사신은 양국의 우호 관계를 증진하고 문화적인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는 데 목적을 두고 서화를 선물하곤 하였다. 명나라 사신은 귀한 선물을 사양하면서 조선왕실에서 증여한 書簇⋅畫簇⋅法帖⋅書帖등 서화 선물을 흔연히 받 아드렸다는 기록도 서화 교류의 융통성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또한, 명나라에서는 조선 서화에 대한 생기면서 명나라 사신은 조선왕실에서 적 극적으로 조선 서화를 청탁하기 시작하였다. 15세기 명나라와 조선 간의 서화 교류는 보편성과 편의성을 가지고 있다. 詩文唱酬를 진행하는 데 참여 인원이 높은 문학적인 수준을 갖춰야 한다는 상황과 달리 서화 교류는 쉽게 접할 수 있는 교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따라 많이 배우지 못한 명나라 內史⋅少監도 禮物贈受⋅請 書請畫의 방식을 통해 서화 교류에 많이 참여하였다. 한편, 서화 자체의 특성(휴대성, 적당한 가격, 예민한 문자가 없음 등)은 선천적인 편의성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명나라 사신은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친한 조선 관원에게 서화를 선물로 하여 우호 관계를 추진하면서 서로 부담이나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朝⋅中문화 교류사’ 및 ‘동아시아 예술사’의 시각으로 볼 때 15세기 朝鮮使行중 발생한 서화 교류는 새로운 ‘畫題’⋅畫法을 도입 하여 15세기 조선 畫壇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고, 16~17세기 朝⋅明간 활발한 서화 교류의 성황을 위해 토대를 마련하였다.
조선은 성리학의 왕도정치 실현을 목적으로 세워진 나라였다. 건국 초기부터 고려의 불교식 사회사상을 비판하면서 숭유억불 정책이 시행되었고, 고려의 기반이 되었던 불교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이단으로 지목되었으며, 불교 이단성의 비판은 건국초기부터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는 근거가 되었다. 16세기 성리학이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학문이 유입되었고, 당시 명나라에서 성행하던 양명학도 매우 이른 시기에 조선에 전래되었다. 그런데 이 양명학 역시 주자학의 선명성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이단성이 지적되었는데, 주된 비판의 내용은 불교와의 유사성이었다. 명나라로 사행을 간 조선인은 명나라 학자와의 논쟁을 통해 양명학의 공부 방식이 참선의 방식과 유사함을 지적하였으며, 양명학은 선학(禪學)이라는 명제는 조선 학자들 사이에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17세기 일본의 유학이 아직 맹아 상태일 때, 경전을 논하는 이들은 주로 승려 계층이었기 때문에, 조선인에게 이들의 이단성을 비판하는 것은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그 후 일본의 유학이 성장하여 고학 등이 등장하였을 때 조선인은 양명학의 연장선상에서 이러한 경향을 이해하였다. 결과적으로 명나라 사행에서의 양명학 논쟁 경험이 일본 유학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방해하였던 것이다. 1764년 일본에 번성하는 고문사학의 경향에 대한 심각성을 인지하고서야 일본 유학의 실체를 깨닫게 되었고 비판의 논점이 불교 유사성에서 경전 이해의 오류로 옮겨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