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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몽골의 음주문화를 살피고 원대 새롭게 조합된 금속제 음주기의 기형, 문양, 기법 등을 분석하여 원대 음주기의 특징을 고찰한 것이다. 원을 포함한 몽골제국에서 발견된 음주기도 함께 비교하여 기물 간의 유사점과 차이점, 그리고 이들 지역 간의 교류 양상도 탐 색하였다. 몽골이 세운 원대에 사용된 음주기는 이전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그들이 음용한 주류의 특성과 음주 취향, 그리고 몽골제국의 확장에 따른 다양한 민족ㆍ문물ㆍ문화적 요소가 융합 되면서 독특한 양상을 보인다. 원대 신유형의 음주기는 몽골제국에 속한 러시아 남부의 주치 울루스와 중동의 훌레구 울루스에서도 등장하였다. 이는 지역별로 다소 차이를 보이지만 거 리를 초월한 ‘대몽골 울루스’ 라는 하나의 연합체 안에서 음주문화가 공유되었다는 것을 의 미한다. 원대 음주기는 금속기와 도자기로도 두루 제작되어 재질 간의 기형을 공유했을 뿐만 아니라 고려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7,800원
        2.
        2021.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의 목적은 가정 이곡(1298-1351)의 이중적 정체성을 살펴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몽골이 수립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하에서 세계인과 고려인의 이중적 정체성을 가지고 방황한 이곡의 정신적 여정을 검토하려 는 것이다. 이곡은 한산의 호장 출신이다. 그는 1320년 고려의 과거에 합격했으나, 가문이 한미하여 현달하지 못했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1333년 원(元) 의 과거시험인 제과에 응시해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 결과 고려인 합 격자로서는 처음으로 원 중앙 정부의 관리로 임명되었다. 이곡은 1348년 영구 귀국할 때까지, 15년간 원과 고려를 오가며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 이곡은 몽골제국의 개방성과 보편주의를 신뢰했다. 그에 따라 국가를 초월한 평천하의 정치적 이상을 꿈꾸었다. 다른 한편 그는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원 관리로 있으면서도, 고려 정부의 불공정한 인사 정책을 비판했다. 또한 고려 정부를 대변해, 원의 공녀정책의 부당성을 역설 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 조정에서 고관에 오르지 못한 이곡은 평천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었다. 몽골과 고려의 정치세계에 어디에도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그는 경계인에 머물렀다. ‘원유자(遠遊子)’ 또는 ‘동서남북인(東西南北人)’이란 이곡 스스로의 자칭은 경계인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어머니와 황제는 그의 삶의 두 축이었다. 그는 황제의 도시 연경에 머물렀지만, 다른 한편 언제나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이곡은 몽골제국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이 만들어낸 세계인 이자 동시에 고려인이었다. 그의 좌절은 어떤 의미에서 몽골제국의 보편성의 한계였다. 또한 몽골제국 아래 고려가 경험한 세계화의 외연적 경계였다.
        7,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