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민화는 근, 현대 미술계에서 회화작품으로 인정받지 못 하고 공예미술의 일부로 인식되었다. 대부분의 작품에 서명이 없고 정형화된 밑그림을 바탕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내용은 주 로 민중의 염원을 담아 필요한 곳에 걸어두는 양식이었기에 더 욱 그러했다. 이러한 이유로 전통 민화는 1970년대 후반 현대 화 작업에 박차를 가하던 미술계에서 존재감이 미약하였다. 1980년대 한국 사회는 역사 인식의 새로운 성찰을 통한 민족 적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권위주의에 대한 국민의 저항을 시 작으로 봉건사회의 해체가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으면서 미술계 에서도 전통적 규범에 얽매이지 않은 현대적인 화풍(畫風)을 수립하려는 시도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미술계 일부에서 한 국의 정신성과 조형성이 담겨있는 전통문화를 연구하기 시작했 고 이 중 일부의 한국화 화가들은 전통 민화에 담긴 예술성을 발견하고 시대감각과 결합한 새로운 화풍을 개척하였다. 이 시기 전통 민화를 연구해서 작품을 제작한 대표적인 화가 로 박생광을 들 수 있다. 1970년대 후반 한국 미술계가 서양 미술에 경도되어 그들의 철학과 화풍을 추종할 때 박생광은 일 찍이 한국의 전통문화에 주목했다. 특히 시대감각이 뒤처졌다 고 터부시되던 전통 민화를 받아들여 현대적으로 변용한 독창 적인 화풍을 선보이며 한국 미술계에 큰 파란을 일으켰다. 박생광의 새로운 시도는 근대화 초기 유입된 일본 화풍과 서 양화풍으로 인해 흔들리던 한국미술의 정체성을 정립시킬 수 있는 큰 역할을 하였다. 전통 민화를 차용하여 한국적인 화풍 을 제시한 박생광의 업적을 통해 로컬미술의 국제적 흐름 속에 한국미술이 세계에 진출할 가능성을 가늠해보고자 한다.
1970년대 후반 동양화는 일군의 전위적인 작가들과 화단에 진입하기 시작한 신진작가들에 의해 시대정신에 입각한 새로운 전통회화를 수립하기 위한 혁신적인 미술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술계는 동양화라는 명칭을 한국화로 개칭하고 일제강점기에 유입된 일본 화풍의 배격과 전통 채색기법에 기 반을 둔 새로운 채색화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시도했다. 이는 1980년대 한국 사회에 불어 닥친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정립시켜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자는 국학운동과 궤를 같이하는 미술운동이었다. 이러할 때 박생광은 1977년 일본에서의 작품활동을 끝내고 귀국하여 그동안 연구해온 민족 정서가 충만한 새로운 채색화를 시도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맥이 끊어진 전통 채색기법과 색채를 시대 감각에 맞게 복원하고 작품 속에 민족 정서를 표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사회 전체가 서구 문화에 경도 되어 잊혀 가던 전통 민속 그림과 종교화에서 오히려 모티브를 찾아 작품을 제작하였다. 박생광의 이러한 시도는 당시에 선진 화풍으로 인식된 서양화에 비해 시대정신과 감각이 사회와 이질적으로 멀어지던 동양화를 개혁하여 미술계와 일반 대중들에게 새로운 한국화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특히 한국의 전통미감이 서려 있는 1977년 이후 작품들은 미술사적으로 한국 채색화의 모범으로 인정받았으며 세계로부터도 아시아 미술의 가능성을 제시하였 다고 평가받았다. 1980년대 한국 사회는 군부 집권세력의 타도와 민주주의 건설이라는 대명제를 이루기 위한 민중의 궐기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박생광이 1977년부터 1985년에 제작한 여러 유형의 작품 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시대정신을 내포한 다양한 작품들이 존 재한다. 이 작품들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제작한 걸개그림과는 결은 다르지만, 순수회화를 지향하는 작가로서 시대의 아픔을 같이하고 기록으로 남기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