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수륙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살펴보기 위해 기술되 었다. 수륙재의 성립과 전개에는 두 가지 관점이 작동되는데, 첫째 관점 은 수륙재의 의미론적 양상을 중심으로 성립을 설명하는 것이고, 둘째는 현재에 전승된 수륙의문(儀文)의 성립과 변용 등을 중심으로 설명해 보는 것이다. 수륙재의 과거 위상은 국가 의례의 성격이 대단히 농후하다는 것이다. 수륙재의 기원으로 알려진 양나라 무제가 설행한 것 등 국가나 왕후장상 이 주로 수륙재회를 열었으나 일반 민중도 공덕을 쌓기 위해 수륙재를 열었다. 왕실 의례라는 성격은 선영(仙靈)을 연에 모시는 시련(侍輦)에서 잘 확인이 된다. 수륙재의 현재 양상은 설판(設辦)의 축소 등으로 인해 의례의 일반화 가 일어나 수륙재의(水陸齋儀)의 모습이 잘 나타나지 않으며. 19세기 이 후에는 수륙의문의 발간이 일어난 사례가 보이지 않는다. 현재 국가중요 무형문화재를 제외하면 일반적인 재회를 수륙재라고 하는 등 다양한 형 태로 진행되며, 의례 주체의 이원화, 설단 등은 법당 안의 모습을 실외로 옮긴 듯한 양상으로 진행된다. 수륙재의 미래는 재회(齋會: 음식을 제공하는 의례)의 의미가 살아나야 하고, 설행을 내부와 외부의 승려와 재자가 같이 참여해야 하며, 동참자 가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본래 목적의 달성을 추구함과 동시에 전통 문화적인 요소가 사라지지 않도록 유념해야 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고는 인도의 시아귀회(施餓鬼會)를 수용한 중국의 수륙재(水陸齋)가 독자 적인 내용과 목적으로 변용된 양상과 함께, 그것이 고려에 전래되어 조선전기 수륙재 설행의 유행에 문화적 기반이 된 추이를 개괄한다. 또한 조선전기에 이 르러 전사회적으로 크게 유행하게 된 수륙재의 설행양상을 그 대상과 목적을 중심으로 살피어, 조선전기에 국가주도적으로 거행된 수륙재가 조상 등 특정 영 가의 천도를 중심으로 하는 불교식 상제례(喪祭禮)로 수렴되어 간 면모를 밝힌 다. 마지막으로 무차대회(無遮大會)의 개념적 차별성을 주목하여 조선전기에 일 반적으로 인식되었던 수륙재와의 차이를 확인하고, 그것이 조선 중기 이후 ‘여 제(厲祭)’라는 유교식 국가제사로 대치되거나 민간불교를 중심으로 하는 독자적 방향으로 변모해 간 흔적을 조망한다.
조선전기 수륙재는 특정 또는 불특정 망자에 대한 불교적 구제를 목적으로 설행되었다. 그 각각을 대표하는 것이 왕실의 조상(祖上)을 대상으로 하는 불교 식 상제례로서의 수륙재와 고려 왕씨를 위한 추천(追薦) 수륙재이다. 그 중에서 도 전자가 더 중요한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불교식 상제례의 경우 국가의 강력 한 개입 하에 칠칠재, 백일재, 소상재, 대상재, 그리고 대상 이후의 기신재가 모 두 수륙재로 합설되었으며, 이는 수륙재가 불교식 상제례의 의례적 형식을 이루 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특정 망자를 대상으로 하는 불교식 상제례로서의 수륙재 이든 불특정 망자를 대상으로 하는 추천 수륙재이든, 그 모두가 국가의 강력한 주도 하에 제도화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교단에 대한 국가권력의 강력한 개입은 전통시대 동아시아 3국의 공통적인 특징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 불교에 강하게 보이는 특징이라는 평가가 최근 학계에서 힘을 얻는 추세이다. 조선전기 수륙재의 제도화와 정비 과정에서 보이는 국가권력의 막강한 관여 역 시 그 같은 평가에 중요한 사례가 될 것이다.
무차대회란 수륙재의 내용을 이루는 한 축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개념적으로 무차대회와 수륙재는 분리될 필요가 있다. 조선전기의 수륙재가 특정 망자 특히 조상의 천도를 주된 목적으로 하여 변용될 때, 무주고혼을 포함하여 저승과 이 승의 모든 존재들을 평등하게 풀어먹이는 데 목적을 둔 무차대회는 그와 차별 적인 모습을 띠며 독자적으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조선전기의 수륙재가 어느 순 간 주자가례(朱子家禮)와 여제(厲祭)라는 막강한 유교적 의례질서로 빠른 속도 로 대체되고 국가주도적 수륙재 설행의 전통이 단절된 이후, 무차대회는 다시 불교식 상제례의 양상과 함께 수륙재의 성격 일부로 흡수되어 민간의 불교신행 을 중심으로 하여 전사회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