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瓷器)는 조선의 중요한 대외 교역 물품이 아니었다. 조선은 전국에 걸쳐 자리하는 가마에서 필요한 백자를 생산했으므로 자기를 만들지 못한 나라들과는 수입해서 사용하는 그 릇의 종류와 크기, 수량이 달랐다. 유럽 등지에서는 새롭고 이국적인 동아시아의 자기가 여 러 왕실과 귀족들의 수집품이 되었지만 조선은 자기 자체를 이미 수 세기 동안 일상의 그릇 으로 사용해왔으므로 다양한 문양이 장식된 일부 청화백자나 오채자기 위주로 중국과 일본의 자기를 들여왔다. 서울 시내 출토양상을 보자면 조선 후기 한양도성에 유입된 외국 자기의 수량은 조선 전 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모양새다. 19세기 후반 이후에는 유상채 자기의 증가 현상 이 추가되지만 청화백자로 만든 발과 접시 등 반상기가 외국 자기의 주류를 이루는 특징은 조선 전기 이래로 계속 이어졌다. 조선시대 해외 교역이 사행이나 일부 상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중국과 일본의 물 산은 자연스럽게 왕실과 사행에 직접 참여하는 관리, 역관 혹은 상인 계층을 시작으로 소비 의 흐름이 마련되었다. 서울 시내에서 조선 후기 외국 자기들이 출토되는 유적이 궁궐이나 그 주변 혹은 시전행랑이 자리하는 종로대로 일대에 주로 위치하는 것도 이러한 상황이 반영 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