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국 명산문화의 정체성을 인문지리적인 관점에서 탐구하기 위한 목적의 일환으로 명산문화의 개념 정의, 사상적 배경 및 구성 요소, 역사적 기원과 형성 유형을 살펴보고,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명산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중 심으로 유학적 명산문화의 전개와 의의 등을 주요 논제로 고찰하였다. 조선조 유학사상은 한국 명산문화의 인문적 발전을 이끌고 명산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바꾸었다. 道學者들에게 있어 명산경관은 天地動靜의 이치를 體現하 고 있는 공부텍스트이자 觀物察己의 유학적 存養 장소가 되었다. 그들은 명산 의 장소이미지를 인간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名山과 名儒의 이미지를 결합시켜 표상하였다. 實學者들에 있어 명산의 산수는 可居地 생활권의 한 입지 요건이 되었고, 명산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의 노력이 뒤따르게 되어 名山誌가 저술되 었다. 白頭大幹과 관련하여 명산에 대한 인식의 提高가 이루어졌고 국토의 祖 宗이 되는 명산으로서 백두산이 주목되었다.
이 글은 지리산의 역사적 성격의 변화에 초점을 두고 名山文化로서 智異山의 正體性을 조선 초・중기의 문헌사료를 통해서 구명한 것이다. 먼저 명산은 인간 이 인위적으로 창출하고 결정한 의미에 의해서 규정・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므 로 명산은 고정되는 경우보다 변화를 겪는 존재로서 사회적 생산물의 성격을 갖고 있어 문화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명산문화는 명산이 의미하는 바의 정체성까지 수렴하는 보다 광의의 의미를 갖고 있다. 조선 초기 지리산은 太祖 李成桂에게 조선 건국과 관련해서 중요한 신성의 장 소이자 그들의 정치적 목적의 정당화를 위한 含意를 지닌 곳이었다. 한편 지리 산의 神聖은 卿·大夫·士・庶人이 숭배 대상으로 하였던 山神으로서 信仰性을 갖 고 있었다. 반면에 왕을 비롯한 위정자에게 지리산의 신성은 명산대천으로서 신성에 정치적 성격을 포함한 이중적 함의를 지녔다. 세종 같은 경우 전통문화 로서 명산대천의 신성을 인정하면서도 惑信하는 신성에 대해서 철저하게 조사 하여 금지하였다. 이처럼 鮮初 지리산의 정체성은 신성에서 신앙성・정치성 등 다양한 함의를 지녔다. 조선 중기 지리산은 지리산권역의 사림들과 수령들에게 仙遊・修養의 공간, 그리고 勳戚政治 개혁을 위한 모색의 공간으로서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럴 때 馬 崇祖가 지리산 天皇을 숭배하다가 죽임을 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지리산이 신앙으로서 神聖性을 크게 잃어갔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지리산의 정 체성은 조선 중기에 이르러 정치・사회적 함의가 커져갔다. 한편 賊徒 張永己 사 건에서 지리산이 인간의 삶 속으로 급속히 편입되는 사회성을 읽을 수 있다. 이 보다 더 사회성과 정치성을 보여주는 사건이 자칭 의병대장 宋儒眞 사건이다. 16세기 말 지리산은 王朝를 부정하였던 송유진을 따르는 한 무리의 활동 공간 이었다. 이는 그만큼 지리산의 정체성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