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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와 동해 The Review of Isabu and East S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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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

제14호 (2018년 12월) 5

특집논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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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상고기 신라의 발전과정에서 동해안 진출, 悉直谷國과 悉直國의 실체, 또 중고기 신라의 동북방 진출과 悉直州 설치, 異斯夫의 해양활동과 于山國 정벌군의 출항지에 대해 살펴보았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척의 실직국이 안강의 음즙벌국 인근에 실직곡국이라는 변진과의 무역중계지를 운영하다가 영토분쟁이 생겨 상실하였다. 하지만 음즙벌국은 신라의 공격을 받 아 멸망하였고, 영일만 일대는 신라에 편입되었다. 그러자 실직국은 해상활동과 함께 영일만 일대를 활용하고자 신라에 자진 항복하였다. 실직국이 항복한 이후 신라는 이 지역을 재지세력이 독립성을 유지한 채 통치 하는 간접지배 방식으로 계속 통치하다가, 5세기 말에 직접지배단계에 들어갔으며, 505년(지증왕 6) 실직주를 설치하였다. 이로써 삼척지역은 신라의 동해안 북변으로 진출의 중요한 군사적 전진기지가 되었다. 신라는 중고기에 이르러 동북방으로 진출은 동해안 연근해 해로를 최대한 활용 하여 북방의 거점 확보에 노력하면서, 동시에 육로로 진격하여 영역을 확보해 나가는 육해 양동작전을 수행하였다. 이사부는 505년 실직군주에 임명되자 중앙 정부에 선박 이용의 중요성을 건의하여 관련 제도를 정하게 하였다. 또 지증왕대 낙동강유역 금관가야 지역을 점령한 공로로 받은 가야계 사람들을 동북방 지역으로 사민시켜, 그들이 보유한 선진 해양기술을 접합시키고, 실직지역에서 군대를 양성 하여 수군기지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512년 하슬라군주로 옮긴 뒤 우산국을 정복 하였다. 우산국 정벌군의 주력 부대가 출항한 곳은 삼척지역이다. 결국 이사부는 우산국을 정복함으로써 그곳의 토산물 수취와 동해 해상권을 장악하여 경제적 부를 확보하였고, 그 결과 정치군사적 영웅이란 명망과 함께 곧이어 중앙 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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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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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수토에 관한 연구는 다양한 방면에서 진행되어 왔다. 우선은 조선후기 울릉도 搜討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한 현황의 사실 관계와 제도적 정착에 대한 연구를 비롯하여 울진 지역의 수토 관련 越松浦鎭城과 待風軒 등에 대한 연구, 그리고 수토사가 그려 온 울릉도 지도 및 대풍헌 현판 등 자료에 대한 연구나 사료에 대한 해제 등도 있으나 수토사와 관련하여 포괄적인 측면에서의 관련 유적에 대한 연구는 없었다. 본 논문에서는 여러 기록을 통하여 수토사 관련한 유적지를 연구하였다. 삼척지역에 소재하는 울릉도 수토 관련 유적지는 삼척 수군 관련 유적지, 수토 수행과정에서의 대풍소나 祭儀 神堂, 수토에 참여한 인물 관련 유적지, 기타 관련 유적지가 있는데 이를 각각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삼척수군진이 설치되어 있던 삼척포진과 관련된 유적지인데, 이와 관련하 여서는 軍船을 정박시키는 포구였던 삼척포와 수군의 각종 장비와 물자를 보관하 고 첨사가 군관을 거느리고 주둔하였던 삼척포진성이 그 핵심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유적에 대한 조사에서 수군진성의 하부가 지하에 매립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둘째는 삼척에서 울릉도로 항해하는 과정과 관련된 유적이다. 삼척에서 출발하는 수토군들은 먼저 모든 장비를 갖추고 營下에서 바람을 기다리다가 적당한 바 람이 불 때 바다로 나가서 출발하였는데, 이 때 바람을 기다리는 대풍소와 안전 항해를 기원하는 여러 가지 제사를 곳이 있었다. 특히 1872년에 만들어진 지방지도의 삼척부 지도를 보면 삼척수군진성으로부터 오십천 건너편 고성산(오화리산성이 있는 곳) 근처에 붉은 선 안에“東海”라고 표시해 놓은 것이 있는데 이곳이 동해신제를 지낸 곳으로 추정된다. 세 번째 삼척의 수토 관련 유적으로는 후망소, 수토사 인물 유적, 울릉도 유적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울릉도 수토가 실시되는 동안 바닷가에 위치한 마을에서는 임시의 거처를 만들고 바다를 감시해야 했는데, 그러한 후망소가 어느 곳에 설치되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체로는 울릉도에서 돌아오는 선박이 표류할 경우 동해안 지역에서 도달할 가능성이 있는 곳에 설치되었을 것이며, 대풍소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척후가 있었다고 하는 삼척의 藏吾里浦(근덕면 장호리), 그리고 『陟 州志』(上)에 바닷가의 망대인 海汀候望으로 기록된 介谷, 宮村, 馬頭, 窟岩, 龍場 이 그와 관련된 곳일 가능성이 크다. 아을러 고려시대에 삼척 지역에 설치된 戍所 인 桐津戍․臨遠戍가 있던 곳도 바다를 감시하고 방어하는 중요한 요충지였으므로 이곳도 후망 장소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수토를 수행한 인물과 관련된 유적지(혹은 유물)는 삼척지역에서 현재 뚜렷하게 확인되는 곳이 없다. 삼척영장으로 울릉도 수토를 수행한 장한상은 경북 의성에 묘가 있고, 이준명은 경기도 성남시에 묘가 있으며, 구억은 충남 공주에 묘가 있다. 여타의 수토를 수행한 것으로 확인된 삼척첨사의 관련 유적은 확인되지 않으며, 육향산에 있는 삼척영장송덕비 가운데 울릉도 수토를 수행한 삼척영장 송덕비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월송포 만호가 수토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월송만호의 上官은 삼척영장이었기 때문에 삼척영장송덕비 자체는 관련 유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조선전기에 울릉도를 세 번씩이나 왕래하며 수토 임무를 행한 삼척사람 김인우의 유적은 앞으로 확인될 가능성이 있는 바, 향후 적극적으로 자료를 발굴하여 선양할 필요가 있다. 이외에도 울릉도에 소재하는 수토 관련 암각문이나 표석, 김인우와 관련된 태하리 성하신당 등도 관련 유적지에 해당하나 본 논고에서는 삼척지역에 소재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였으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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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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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들어와 울릉도․ 독도에 대해 수토정책이 취해져 그 관리가 강화되었 다. 이 수토정책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문헌자료에 의해 이루어졌고 고고학적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 필자는 이 점에 착안하여 수토 관련 유적․ 유물을 찾기 시작 하였으며, 이 글에서는 그동안 찾아낸 울진지역의 고고학적 자료들을 소개․분석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고고자료들이 울진지역에서 나타나는 연유를 울릉도의 행정 체계에서 찾아보았다. 특히 대풍헌에 남아 있는 수토 관련 7점의 현판과 「완문」․「수토절목」의 고문서는 울릉도․ 독도 수토 시 수토사들이 항구에서 바람을 기다렸다는 『조선왕조실록』 의 편린을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또 삼척영장과 월송만호의 윤회수토 담당부대로서 그 유적지인 월송포진성이 울진에서 확인되어 그 실체를 밝히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평해군수 심의완 영세불망비 또한 울릉도 연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선이 꾸준히 울릉도․ 독도를 관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물적 자료이면서 조선 정부가 평해군수에게 울릉도 첨사를 겸직하게 하는 『고종실록』의 행정체제 변화 기사를 입증하는 금석문으로써 그 의의가 있다. 이러한 자료들은 조선이 울릉도․ 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인식하고 정기적으로 섬의 상황을 파악하려고 수군을 보냈던 문헌기록을 입증해주는 고고학적 자료들로 울릉도․ 독도 수토연구에 귀중 한 1차 사료들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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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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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19세기 조선 정부의 울릉도·독도 통치의 일환으로 시행된 울릉도 수토제(搜討制)의 운영 실태와 그 의의를 연구하는 것이다. 조선과 일본이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인 독도를 하나의 셋트로 인식하여 왔음은 양국의 역사 및 지리 문헌에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조선 정부의 울릉도 수토는 조선 정부가 울릉도와 독도를 자국의 고유한 영토로 통치하였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다음 몇 가지를 중점적으로 연구하였다. 첫째, 필자는 19세기 울릉도 수토 연도에 관해 조사하여 논문으로 보고한 적이 있다. 이 글에서는 필자의 이전 논문에 누락되었던 것과 새로 발견한 사료적 근거들을 추가하고, 오류를 교정하며, 과도하게 추정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삭제하여 현 단계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수토 일람표를 제시하였다. 둘째, 필자의 이전 논문에서 소홀하게 다루었던 울릉도 개척기, 특히 1889∼1894년의 울릉도 수토제 운영 실태를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셋째, 감영의 장계(狀啓)에 인용된 수토관의 첩정(牒呈)을 활용하여 19세기 전 기간에 걸쳐 수토가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 었는지 수토 노정과 수토 내용을 살펴보았다. 19세기 전반기 조선의 역사는 소수의 가문에 의한 ‘세도정치기’로, 이양선의 출 몰로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안으로는 민란 등 소요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는 울릉도 수토도 잘 행하여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론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논문은 세도정치기에도 울릉도 수토가 정기적으로 잘 진행되었고, 19세기 후반 울릉도 개척시기에도 수토제가 계속 존속되었음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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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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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영장은 1672년(현종 13)에 신설되었다. 신설 당시 삼척영장은 전임 영장이 아니라 삼척첨사가 겸임하는 영장이었다. 그 후 삼척영장은 1673(현종 14)년에 영동지방 토포사를 겸임하였다. 그러나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 사이에 삼척영 장이 삼척포진 主將의 본직이 되고 삼척첨사는 겸직으로 바뀌었다. 이로써 삼척영장은 전담 무신이 파견되는 전임 영장으로 전환되었다. 이와 동시에 삼척첨사 자리는 폐지되었다. 비록 정조 대에 들어와 삼척첨사 자리가 복구되었지만 삼척영장이 겸임하는 자리로 바뀌었다. 그 후 고종 대에 들어와 울릉도첨사가 삼척영장을 겸임하기도 하였다. 삼척영장은 다른 지방 수령에서 옮겨온 자들이 많았다. 그리고 삼척영장의 평균 재임 기간은 약 12.9개월이었다. 삼척영장이 떠나게 된 사유는 다른 관직으로의 이동이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였다. 대부분 오위장 ․ 금군장 등 중앙 관직으로 옮겨갔다. 이를 보면 삼척영장 자리는 지방 관직에서 중앙 관직으로 옮겨가는 중간 통로였다고 하겠다. 한편 삼척영장은 월송만호와 함께 교대로 울릉도 수토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울릉도 수토 관리가 인삼 채취의 임무를 띠고 파견되던 시기에는 오직 삼척영장만이 파견되었다. 그리고 울릉도 수토 업무를 담당한 삼척영장과 월송만호의 공식적인 직함은 搜討官이었다. 하여튼 조선후기 삼척영장은 영동지방의 지역 방위와 치안 유지 그리고 울릉도를 비롯한 동해 바다 방어를 책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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