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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은 근대 신성로마제국, 특히 그 독일어권 지역 귀족 궁정들의 여성 음악후원, 그 후원을 통한 음악 및 음악문화 전파를 탐구한다. 탐구대상은 엘리자베트 폰 헤센-카셀, 소피 엘리자베트 폰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소피 샬로테 폰 하노버의 경우이다. 이들은 당대에 통상적으로 여성에게 허용된 범위를 넘어선 인문주의적, 음악적 교육 및 체험을 누렸으며, 이미 본가의 궁정 에서 자신의 연주력, 연주 기획력을 펼쳤다. 훗날에는 시가 궁정의 음악을 (재)구성하고 재건하며 관리해냈다. 본가의 음악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이어가며 그 과업들을 수행해냈다. 그리하여 근대 이탈리아, 프랑스의 음악 양식과 극적 음악장르들, 실내악이 이동하며 정착했다. 독일 바로크 음악의 전파, 근대 독일 오페라의 발전도 구현되었다. 영국 음악이 독일 지역들로 스며들기도 했다. 무엇보다 17, 18세기 독일의 음악 중심지들에 음악적, 음악문화적 정체성의 토대가 놓여졌다. 음악교육, 음악애호의 대물림을 통해 실현된 모녀 2대에 의한 2중 전파 역시 흥미롭다. 당대 궁정 음악후원의 주목적이었던 군주의 권세 과시를 벗어난, 음악에 대한 순수한 애정에서 비롯된 후원 행위도 특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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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9.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삼가지역 사족들이 전쟁 발발을 알게 된 것은 4월 14일 무렵으로 생각된다. 이후 전황은 학맥과 혼맥을 통해 속속 삼가 사족들에게 전해 졌을 것이다. 4월 27일 쯤 삼가현의 兎洞은 왜군 40여 기의 기습 침략 을 받았다. 삼가 읍치에 주둔하던 우병사 조대곤은 가회의 晦山書院으 로 물러가 숨었으며, 곧 이어 삼가현감 張翎도 황계로 도피했다. 결국 삼가현의 읍치와 주변 지역은 무인지경에 놓였다. 다만 회산서원 이웃의 구평리는 비교적 안정된 상태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초유사 金誠一 의 부임으로 말미암아 삼가지역 사족들의 전쟁 대응에도 변화가 일어 났다. 삼가지역의 의병 창의에는 초유사 김성일과 소모관 李魯 등의 외부적 요인만이 아니라 구평리 尹彦孝 가문의 주체적 역량이 결정적인 한 몫을 했다. 윤언효는 삼가지역의 의병 창의에서 주체적 역량으로 家僮을 징발하고 家財를 기울여 군비로 삼았으며, 이를 朴思謙·朴思齊· 盧錞·曺繼明에게 통고하였다. 다만 노쇠한 윤언효는 구평리의 윤탁, 백동리의 박사겸·박사제·박엽·정진철, 판현동의 조계명 등이 의병 소모·군량과 군수 마련, 대외 접촉 등과 같은 실무를 주관하도록 했다고 본다. 경상우도 사족들의 공론은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두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이전 단계에서 제기한 경상우도 사족들의 공론은 축성을 비롯한 수령들의 가혹한 정사와 탐학을 응징하자는 것이었다. 임진왜란 초기 단계에서 사족들이 제기한 공론은 퇴주만 거듭하여 경상도를 적의 소굴로 만든 김수를 논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특정 고을이나 가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경상우도 차원의 공론이라고 봐 야 할 것이다. 특히 진사 尹彦禮는 의병장 곽재우를 모함하는 감사 김수 의 두 번에 걸친 격문을 반론하는 통유문을 주도하는 등 경상우도 사족 들의 공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윤탁의 삼가 의병은 곽재우의 의령 의병과 느슨한 연합 형태의 동맹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두 의병은 하나의 통솔체계 아래 적절하게 군무를 분장한 조직을 갖추었지만 때로 독자적인 의병 활동을 펼쳤다. 물론 윤탁은 곽재우 의병군단의 영장으로서 의병장 곽재우의 통솔 아래 경상 좌도의 현풍·창녕·영산의 수복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삼가 의병장 윤탁은 1592년 진주성 전투 때 다른 남명학파 의병장들과 함께 진주성을 外援하여 대첩에 일조하였 다. 1593년 진주성 전투 때 곽재우의 의령 의병과 달리 삼가 의병장 윤탁은 승패가 예견되던 고립무원의 진주성에 입성하였다가 성이 함락 되면서 순절하였다.
        4.
        201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영조대의 하동 안계 마을의 학자 하대관의 가문계승의식과 향촌사회활동을 알아 본 것이다. 시기는 1748년부터 1758년까지 10년에 걸친 기간이다. 하대관의 글이 오로지 이 시기에 걸쳐 남아 있기도 하지만, 이 시기의 그의 활동이 1759년 가을부터 전개되는 종천서원 시비의 배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문집의 분석을 통해 볼 때, 하대관은 부친으로부터의 가학을 통해 자랑스러운 선조들의 업적을 알게 되어, 그의 학문은 선조들의 전통과 남명학을 이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에 그의 학문은 향당에서 충절과 효행, 경의를 중시하는 성격을 갖는다. 그는 영남남인 외에도 기호 남인과의 교류를 강화하여 자신의 가문과 진주 사족들의 위상을 높이려고 했다. 『겸재집』 간행, 족보편찬, 교육과 교화활동, 부당한 조세징수 반대, 『진양지』 간행 등은 모두 이러한 그의 사상을 반영한다고 할 것이다.
        5.
        2017.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덕천서원은 南冥 曺植(1501-1572)을 향사하는 서원이다. 그 문인 寧無成 河應圖가 자신의 田莊을 서원 터로 제공하여서 처음 德山書院 으로 창건을 보게 되었다. 이 서원의 창설은 남명의 감화를 받은 여러 문인 들의 스승을 존모하는 마음과 이를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경상도 관찰사와 진주 목사가 적극적으로 도와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서원은 설립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강학활동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학파 내에서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는 원장과 원임이 있어서 제대로 운영하여야만, 제향된 인물이 추구했던 학문 정신을 체득할 수 있고, 나아가 사회적으로 교화의 역할 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이 서원의 운영을 주도하였던가 하는 문제는 서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문제의 하나다. 덕천서원은 남명의 만년 강학지에 설립된 것이어서 남명 문인들이 대거 참여하여 설립이 이루어졌고, 따라서 초기에 서원 운영을 담당했 던 이들은 ‘범남명학파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남명학파가 주도하던 북인 세력이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정치적 으로 패퇴함으로써 급변할 수밖에 없었다.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를 주도하던 가문으로 단성 지역에는 안동권 씨, 성주이씨, 합천이씨, 진주류씨, 상산김씨 등이 있었고, 진주 지역으 로는 안계‧명석 및 수곡‧단목에 거주하는 진양하씨 사직공파와 시랑공 파, 나동의 태안박씨, 소남의 함안조씨 등이 있었다. 물론 이들 가문 이외에도 여러 십여 가문이 있지만 원임에 선임된 숫자의 측면에서 보면 이들 가문이 덕천서원의 운영을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 덕천서원의 창건 및 초기 중건에 관여하였던 인물의 후손들이거나, 초기 원생록에 이름이 올라 있던 인물들의 후손 들이다. 남명학파는 인조반정 이후 30여 년이 지난 즈음 남명집 훼판 사건을 기점으로 해서 서인화와 남인화가 이루어지는데 서원의 운영은 남인이 주도하였다. 따라서 이들 가문은 모두 남인 가문에 속한다. 그러므로 사우의 연원 또한 남인 계통을 따라서, 갈암‧밀암‧대산‧정재‧한주 등과 성호‧순암‧번암‧성재 등을 종유한 인물들이 서원 운영을 주도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6.
        201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瞻慕堂 林芸은 조선 중기 慶尙右道의 저명한 학자였다. 그는 부친 石泉 林得蕃과 형 葛川 林薰으로부터 家學을 계승한 바탕 위에서 退溪 李滉의 제자가 되어 학문을 더욱 심화시키고, 교유의 범위를 확대했다. 남명을 만나 영향을 받고 학문의 방향을 수정하였으니, 남명의 제자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생애의 초반에는 초야에서 학문 연구와 심성 수양을 하고 있다가 學⾏이 알려져 추천을 받아, 1567년 51세 때부터 벼슬 길에 나아갔다. 크게 경륜을 펼칠 수 있는 자 리가 아닌 참봉직에 있으면서 조정에 장래 경륜을 펼칠 기반을 닦고 있었는데, 1572 년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치고 말아 그가 이룬 학문을 크게 펼쳐 보지 못 했고, 많 은 士友들이 아쉬워하였다. 첨모당 같은 유림에 비중 있는 인물이 나온 이후로, 그 후손들에 의해서 이 집안은 慶尙右道에서 학문이 있고 ⾏誼가 있는 대표적인 가문의 위상을 지속적으로 유지 하였다. 그 손자 林⾕ 林眞怤에 이르러 학문하는 家門으로서의 위상을 더욱 확실히 하였고, 그 林⾕의 후손들도 학문하는 가문의 위상을 계속 지켜 나갔다. 특히 石泉은 자식 교육에 전념하여 學⾏兼全의 교육을 몸소 실천하여 성공하였 다. 그 두 아들 葛川 林薰과 瞻慕堂 林芸이 나와 학문과 덕행으로 重望을 얻어 家聲을 높였다. 갈천은 退溪 南冥과 도의지교를 맺어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고, 첨모당은 퇴계의 친밀한 제자가 되고, 또 남명에게 지도를 받음으로 해서 조선 학계의 양대 宗匠의 영향을 모두 받게 되었다. 퇴계와 남명의 학풍을 아우르는 이런 특징은 瞻慕 堂의 후손들에게 계속 이어져 조선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瞻慕堂은 51세 때 추천을 받아 출사했지만, 경륜을 펼칠 정도의 승진을 하지 못 한 채 일찍 세상을 떠나 영향을 크게 미치지 못 했다. 그 아들들도 대부분 일찍 세상 을 떠나는 바람에 학문적으로나 관직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 했다. 그 손자 林⾕ 林眞怤가 외조부 ⽴齋 盧欽, 蘆坡 李屹 등의 南冥學派 계통의 학문을 계승하 여, 퇴계학과 남명학을 아우르는 학문을 이루었다. 許眉叟 趙澗松 등과 교유를 통 해 학문의 폭을 넓히고 활동범위도 넓혔다. 특히 허미수와의 교유를 통해서 近畿南 人의 학자들의 학문 경향도 접하게 되었다. 瞻慕堂 가문은, 조선 전기 石泉 林得蕃에 의해서 家學이 형성된 이후 葛川 林薰, 瞻慕堂 林芸 형제를 거쳐 전국적인 學問名家의 위상에 올랐다. 그 이후 첨모당의 손자 林⾕ 林眞怤가 큰 학문을 이루었고, 그 아들 손자를 거쳐 조선말기까지 거의 학문이 끊어지지 않았고, 여러 종류의 문집을 남겼다. 특히 이 집안은 오랜 기간 대 대로 孝悌를 중심으로 실천 위주의 학문과 저서를 중시해 온 가문으로 江右地方의 대표적인 學者家門으로 손꼽을 수 있다.
        7.
        2016.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晋陽姜氏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名門大族으로 역사상 많은 인물을 배출해 각 방면에서 크게 활약해 왔다. 진양강씨는 모두 高句麗 말기의 장군 姜以式을 시조로 삼는다. 강이식의 후손 가운데 고려 후기 姜啓庸은 벼슬이 國子博士였으므로 그 후손들을 博士公派라 일컫는다. 강계용의 손자 姜師瞻은 벼슬이 監察御史였으므로 그 후손들을 御史 公派라고도 한다. 어사공은 공목공의 증조부이다. 恭穆公 姜蓍는 1339년 晋州에서 태어났다. 1357년 成均試에 합격하여, 1362년 출사한 이후 내외의 여러 관직 을 거쳐 門下贊成事에 이르고 晉山君에 봉해졌다. 恭穆公이 가문의 위상을 크게 격상시켰고, 공목공에 이어 그의 형제 와 아들들이 모두 정승의 반열에 들어 일국의 명문이 되었다. 당시 불교가 성행하던 시대에 이미 儒敎思想을 철저히 실천했고, 실 용학문인 農學에도 관심을 가져 農書를 간행해서 보급했다. 두 아들 通亭 姜淮伯, 通溪 姜淮仲이 朝鮮 왕조에 다시 출사하여 가문의 기반을 닦았다. 이후 姜碩德, 姜孟卿, 姜希顔, 姜希孟 등 학문에 있어서나 仕宦에 있 어서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나와 朝鮮王朝 내내 名門家로서의 위상을 유지했다. 이 가문이 이렇게 장기간 동안 명문가로서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 던 것은, 好學과 興學의 정신, 孝友와 忠節을 숭상하는 정신, 겸양과 節儉을 중시하는 정신, 實學的 분위기, 禮讓崇尙의 家風, 행정능력의 출중함, 中國文物의 수용정신 등이 原動力이 되었던 것이다.
        8.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종친은 국왕의 8촌 이내의 친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종친에게 종반직 을 수여하여 왕실구성원으로서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대우하였다. 종 친은 친진되어 종친의 지위에서 벗어나면 과거를 통해서 관직에 진출 할 수 있었다. 이것은 왕실구성원에서 사대부가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종친이라 하여 사회·경제적 지위가 한결같지 않았다. 관직 진 출의 통로인 문과·무과·생원진사시 합격자를 고루 배출한 왕자군파는 94개 왕자군파의 51%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합격자를 배출한 왕자군 파 내에서도 여러 갈래 지파로 나뉘기 때문에 사대부가로 정착한 집안 이 많은 편은 아니다. 본고에서는 정종의 10남 덕천군파 이유간 가계가 종친에서 사대부 가로 더 나아가서는 문관관료 가문으로 성장해간 과정을 통해서 종친 에서 사대부가로 변모해갈 수 있었던 요인들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덕 천군 이후생은 정종의 아들로 태어나서 친왕자로서 봉군되지 않았다. 이후생은 덕천정이란 종반직에 처음 제수된 후 1460년(세조 6)에 봉 군되었다. 그의 아들 이효백·이효숙·이효성·이효창 등은 모두 무예가출중하였으며, 장남 이효백과 3남 이효성은 세조 때에 무과에 급제하였 다. 덕천군 가문은 종친으로서 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 등 여러 국 왕의 신임을 받아 당대에 봉군되어 핵심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덕천군 집안은 명문가문과 혼인하여서 정치·경제·사회적으로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유간은 덕천군 장남 신종군 이효백-장남 완성군 이귀정-4남 함 풍도정 이계수 가계 계통이다. 함풍도정 이계수의 아들 이수광이 이유 간의 부친이다. 이수광은 종친의 지위에서 벗어난 정종의 5세손이었 다. 그는 관직에 나가지 못하였고, 국왕 친족이 들어갈 수 있는 특수 군종인 충의위에 입속되었다. 그에게는 3남 2녀가 있었는데, 3남인 이 유간이 생원시를 거쳐 관직에 나감으로 사대부가로서의 기반을 마련하 였다. 이유간이 관직에 나갈 수 있었던 요인은 생원 획득과 그를 문음으로 추천할 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수광이 정종의 5대손으로 충의위에 소속되는 데 그쳤기 때문에, 이유간과 그의 형제들이 가문을 배경으로 문음에 추천되기는 어려웠다. 이유간은 생원을 획득하여 문음 추천 대 상이 되었고, 그를 추천해 줄 현직 관원이 있었다. 즉 과거와 종친 가문 출신이었기에 형성된 왕실 친인척 그리고 관료 가문과의 인적 네트워 크가 그를 기신하여 관계로 진출할 수 있게 한 바탕이었다. 게다가 이유 간의 아들 이경직·이경설·이경석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서 관계로 나감으로써 이유간 가계가 사대부 가문으로 성장해갈 수 있는 탄탄한 기반이 되었다. 장남 이경직은 광해군대 관료 생활을 시작하여 어려움 이 있긴 했으나 인정반정 이후에는 평탄하게 관료 생활을 하여 당상관 에 올랐다. 3남 이경석은 문과에 급제한 후 7년 만에 당상관에 올른 탁월한 엘리트 관원이었다. 성공적으로 사대부가로 자리 잡은 후에도 이경직·이경석 후손은 지속적으로 생원진사시 그리고 문과에 합격하였다. 한 집안에서 3~4 대 연속적으로 문과급제자가 배출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경직·이경석 후손은 번갈아가며 각 세대마다 끊임없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러나 이들은 소론 핵심 관료이었기 때문에, 숙종 후반 과옥과 영조대 나주 괘서사건 등 노론과의 정쟁으로 집안이 멸문지경에까지 이르렀 다. 이러한 정치 상황에서 이경직 후손 중에는 학문에 몰두하여 양명학 을 연구하는 강화학파로 이름난 집안도 있었다. 18세기 후반 정조대 이유간 가계는 다시 문관 관료가 배출되기 시작하여 19세기 외척 세도 정치기에도 문관관료 가문으로서의 위상을 지켜갔다.
        9.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500년대 초반에 密陽 來進에 奠居한 星山君 李軾의 후손들인 碧珍李氏 麗隱亭派 來進 家門은, 500여 년 동안 동족 마을을 이루어 世居하며 士林家門의 표본이 되어 왔다.이후 계속해서 많은 學者들이 나와 文集을 남겼고, 고을의 鄕校와 書院에 적극 참여하여 士論을 주도하였다.그리고 家訓을 만들어 子孫들을 교육하여 조상의 좋은 점을 배우고, 同族間에는 화목하게 지내고, 나아가 鄕約을 실시하여 鄕風을 先導하는 등 선비정신의 수립과 보급에 誠力을 기울였다.通國의 著姓인 碧珍李氏 가운데서 麗隱亭派 來進 家門은, 국가민족이 戰亂에 휩싸였을 때, 올바른 지도자인 王建을 도와 나라를 안정시키고 民生을 구출한 시조 碧珍將軍 李忩言, 詩文과 學問으로 中國에까지 이름을 떨친 山花 李堅幹, 不事二君의 節義를 지킨 麗隱亭 李思之, 反正功臣이면서도 榮達보다는 恬退에 가치를 둔 星山君 李軾, ��小學��으로 子孫敎育에 성공한 泗濱 李繼胤, 자기 자식보다 宗家를 더 생각한 李貴生, 자식의 科擧 合格 취소에도 초연했던 覽懷堂 李而杜 등 훌륭한 조상을 많이 두었다. 이러한 事行들은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최고의 德目이다. 이런 훌륭한 조상이 있었기에 오랜 세월 동안 후손들이, 來進 家門의 名聲과 位相을 유지해 왔던 것이다.이는 단순히 碧珍李氏 來進 家門만의 精神的 資産이 아니고, 혼탁해 가는 人類社會를 구원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精神的인 좋은 慈養이 될 것이다.孝友를 위주로 한 倫理道德을 중시하고, 學問을 숭상하고, 學者를 우대하고, 자기 가문은 물론 향촌을 先導하는 전통을 유지해 나가는 집안이 좋은 집안이다. 곧 선비정신을 충실히 실천하여 사람다운 사람이 많이 나오는 가문이다. 碧珍李氏 來進 가문이 이런 선비 가문의 전통을 모범적으로 지켜왔다고 할 수 있다.
        10.
        2013.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咸安을 본관으로 하여 함안에 세거해 온 咸安趙氏는, 趙鼎, 趙丹碩으로 이어지는 上祖가 있지만, 文獻에 의한 고증이 불가능하고, 또 함안과 관계된 기록을 찾기 어렵다. 高麗末 琴隱 趙悅에 이르러서야 함안에 정착한 확실한 기록이 있다. 琴隱으로부터 치더라도 이미 600년이 넘는 오랜 기간을 한 곳에서 살아왔다. 중간에 晋州 靑松 등지로 移居한 일파도 있지만, 대대로 함안에서 최대의 성씨로서 집성촌을 이루고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며 살아 왔다. 琴隱의 高麗王朝에 대한 節義를 지켰고, 漁溪가 生六臣으로서 志節을 지킨 이래로 門聲이 더욱 널리 퍼졌다. 丁酉再亂 때 大笑軒이 순절함에 따라 명문이 되었다. 대소헌의 學問과 忠節은 琴隱 漁溪로 이어지는 가문의 전통과 南冥이나 남명의 제자들로부터 받은 실천위주의 교육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 동안 9명의 문과급제자, 13명의 忠節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해 내는 등 학문과 충절로 이름난 집안이 되었다. 大笑軒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오는 데는, 오랜 기간 咸安趙氏 가문의 선조들의 온축된 傳統과 기운이 그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대소헌이 배출됨으로 해서 咸安趙氏 가문은 전국 어느 가문에도 손색이 없는 높은 위상을 획득했다고 말할 수 있다.
        11.
        2012.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is paper is to survey what are the historical background that the Pierson family since their Viking ancestors to the descendents of Arthur Tappan Pierson and their educational contributions that they have made, through analysing a family line of A. T. Pierson’s direct ancestors. The Pierson family deserves scholars’ attention for their important influence in an early history of the establishment of two famous American universities as well as a bible school, which became a university later, in Korea. Thus it will explore how their ancestors’ Puritan value has been succeeded to their descendants and realized by them.
        12.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남명학파와 관련된 각 가문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필자는 이번에 남명 조식의 문인인 文益成 및 그의 후손의 활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합천에 거주하던 문익성은 문과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거쳤다. 그의 아들 문 려도 마찬가지로 문과를 거쳐 중요 관직을 역임하였고, 문할도 진사시에 합격 하였다. 두 형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형제간의 우 애도 돈독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다. 이런 행적으로 인해 그들의 가 문은 경상 우도에서 손색없는 사대부 가문으로 자리잡게 된다. 진주로 이거한 문할의 후손들은 이후에도 이런 사족 가문의 전통을 계승하면 서 진주에서 명망가문으로 뿌리내리게 된다. 그들은 선조의 가학을 잇는 입장 에서 남명학파의 맥을 이어갔고, 또 조선 후기의 정치적 변화 속에서 남인 입장 을 견지하였다. 다른 사대부 가문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멸망한 명나라를 대신해 中華문화를 굳건하게 이어 간다는 입장에서 존주의식을 꾸준히 계승해 가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그들 가문에 대대로 전해지던 大明花의 보호・전승을 통해 이를 실천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13.
        200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后山許愈(1833-1904)를 배출한 三嘉縣의 金海許氏가문은 경상우도에서 문호 를 유지해 왔다. 고려말기 許麒에 의해서 固城에 정착하여 金海許氏가문을 형성 하였다. 다시 허기의 현손 竹溪許珣이 三嘉縣佳會里德村에 移居하였다. 본래 는 무관의 가문이었으나 竹溪의 아들 晩軒許彭齡이 南冥문하에 나아가 공부함 으로 인하여 武業을 버리고 儒學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晩軒은 南冥을 享祀하는 晦山書院창건을 주도하였고, 창건 이후에 회산서원 에 매달 초하루 焚香할 정도로 남명에 대한 존모의 정도가 지극하여 유가로서의 기반을 확실히 잡았다. 그의 두 아들은 倡義하여 忘憂堂郭再祐휘하에서 군공을 세웠고, 또 형제 둘 다 문집을 남겼으니, 유학에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아들 滄洲許燉대에 와서, 문과에 급제하여 文名을 날리고, 대북정권에 협 조하지 않는 절조를 지켰으므로 家數를 크게 제고시켰다. 이후 강우의 비중 있는 가문이 되었다. 滄洲의 손자 臥龍亭許鎬는 굉장한 경륜을 가져 북벌을 담당할 將臣에게 세 가지 계책을 제시할 정도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신실한 선비로서 처신하였는 데, 주로 江左의 학자들과 교류가 깊었다. 晦山書院창건을 주도할 정도로 南冥을 존숭하는 가문이면서 아울러 退溪도 존숭하여, 두 대학자의 장점을 융합하여 발전시키려는 가문의 전통적 학풍을 갖고 있었다. 아울러 倡義를 하는 등 우국연민의 구세정신도 여타 가문보다도 더 강렬 하였다. 이런 전통은 后山에게까지 면면히 이어져, 雷龍亭을 중건하는 일을 주관하고 뇌룡정의 강학을 주도하고 神明舍銘或問이라는 神明舍銘에 대한 역사상 가 장 상세한 주석을 달면서도, 퇴계의 학문을 존숭하여 聖學十圖附錄이라는 聖 學十圖에 대한 精深한 주석서를 내고 있다. 남명과 퇴계를 대립적인 구도로 파 악하지 말고, 후학들이 두 대학자의 좋은 점을 상보적으로 배운다면, 국가민족을 위해서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이 후산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학문은 늘 구세정 신이 있어야 그 존재가치가 있다는 문학관을 갖고서, 문장을 지을 때도 世敎에 도 움이 되지 않으면 지을 필요가 없다고 후산은 생각했다. 후산은 남명․퇴계 우리나라 양대 학자의 학문을 조화롭게 아우른 家學의 바탕 위에서, 寒洲에게 나아가 心卽理說을 배워 계승하여, 19세기 강우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 대학자로 성장하여 많은 제자들을 길렀으며 강우의 학문이 부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4.
        200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진주의 해주정씨는 17세기 이후 진주 지역의 대표적 가문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 져 왔다 이 논문에서 말하는 晉州 의 海州鄭民는 農園 鄭文孚(1565-1624)의 후손 및 농포의 아우 鄭文益(1568-1639)의 후손을 말한다. 농포의 두 아들 鄭大榮 (1586-1658)과 鄭大隆(1599-1661) 및 농포의 아우 鄭文益등 三叔姪이 어떻게 해서 진주에 정착하여 진주 지역의 대표적 가문이 되었으며,남명학파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진주 지역에서 이들이 가진 학문의 성향은 어떠한가 하는 점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진주의 해주정씨는 농포의 아우와 두 아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들이 처음 진주로 온 것은 避兵이 그 주된 목적이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전대의 혼인관계로 인 해 상속받았던 田莊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음도 또한 분명하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다시 서울 생활을 하려고 했었던 것 또한 확인되는 바였다. 그러나 농포가 李适의 난 이후 昌原府使시절에 지은 詠史詩로 인해 遊謀로 처형당하고,遺言 에 의해 그 아우와 아들들이 진주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부분은 좀 더 생각하게 하 는 점이 없지 않다. 광해군 시대 창원부사 시절의 詠史詩로 인해 반정 이후 인조 시대에 역모로 처형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지금으로서는 자료가 부족하여 증빙하기 곤란하지만,이는 당시의 집권층이 농포가 광해군 시절 북인으로서 내암 정인흥과의 관 련이 적지 않았다고 보았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물론 농포로서는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 관련하여 환멸을 느끼고 자손들에게 정치적 은둔을 유언한 것이 아닌가 판단되는 것이다. 해주정씨가 진주에 정착한 초기에는 南冥學派를 영도하는 위치에 있던 謙齋 河弘度의 지우를 업어 남인으로 입지를 굳히는 듯하였으나,1665년을 전후하여 농포의 신원에 앞장섰던 澤堂 李植의 아들畏齋 李端夏에게 집지하는 인물이 나타나면서 서서히 노론화한 것이다. 그러나 노론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것은 경종때 남인으로부터 심각한 핍박을 받은 뒤 영조가 즉위한 이후 이에 대한 보복성 핍박을 남인에게 가함으로부터d였다. 이 일이 일어난 지 20여 년 후에 얼어난 宗川書院 禍變의 주동자가 이 가문에서 나옴으로써 남명학파를 주도하던 남인과의 관계가 극히 악화되었고,근가 지역의 노론 학자들로부터 학업을 전수함으로써 이 지역의 남명학파에 대해서는 상대 척으로 관심이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진주의 해주정씨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남인과의 관계도 대체로 나빴다고 할 수 있고,남명학파에 대한 관심의 정도 또한 보잘것없다고 할 수 있지 만,문집이나 유고 등을 남겼다는 이가 58 인이나 있다는 것은 학문에 대한 관심만큼은 여타 가문에 뒤지지 않으려 하였던 결과로 보인다. 남명학파라는 범위를 벗어나서 생각해 보면, 이와 같은 사실로 인해 해주정씨가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 경남 지역의 학문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