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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
        2019.04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한국의 2차 교육과정기는 일제강점기, 미군정, 교과과정 시대를 거쳐 생활중심, 경험중심 교육을 강조한 시기였다. 당시 미술교육자인 박휘락 교수의 생애사적 탐구를 통하여 2차 교육과정기의 사회적인 구조를 파악하고, 미술교육의 특성과 현황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연구 결과 2차 교육 과정기는 경험중심, 생활중심의 미술교육이 등장하였음을 교육과정, 교과서, 심층 면담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둘째, 임화 모사 위주의 미술교육에서 벗어나 학생 중심의 창조·표현주의 미술교육이 등장한다. 셋째, 교사들의 자발적인 연수회를 통하여 연구하는 풍토가 조성되었다. 이는 창의성을 강조하는 21세기 창의·인성·융합 미술교육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새롭게 발전하여야 할 것이다.
        82.
        2019.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연구는 대한민국에서 국제난민지원단체를 설립하고 20여 년간 난민 보호활동을 하고 있는 이호택 대표의 생애사 연구이다. Atkinson(1998a, 1998b)의 내러티브 탐구의 생애 이야기 면담 방법으로 7회에 걸쳐 생애사 텍스트를 생성하고, Adriansen(2012)이 제시한 ‘타임라 인 면담 분석’으로 코딩한 후, Lieblich 등(1998)이 제시한 ‘통합적 내용 접근’으로 리코딩 했다. 그의 생애 이야기의 독자성을(Lieblich et al., 1998) 일곱 가지 주제 곧, 난민처럼 인생의 가장 약한 지점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활동가의 길을 가게 한 생의 분기점과 결정적 만남, 대한민국 소수자 보호활동의 개척사를 쓴 개척자, 타인을 위해 생명을 나누고자 하는 사명자, 세상을 이해하며 삶이 뒷받침되는 공부를 추구하는 이유, ‘난민들의 피난처’라는 의미, 대한민국 활동가로서의 생애 비전과 좌우 이념을 오가는 통합 방식 등으로 구성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1세대 난민 활동가의 생애사를 통해 대한민국 사회에서 난민 코드를 탈북 코드와의 접합 속에서 개인적, 구조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었다.
        83.
        201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19세기 후반 경상우도 宜寧에 살았던 송파 강우영의 생애와 시세계를 고찰한 글이다. 송파는 忠孝로 이름나고 南冥學派를 연원으로 하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정치적으로 남명학파가 몰락함으로써 張福樞와 金道和를 스승으로 섬겨 남인계열이 되었고, 張錫贇・ 張升澤・田珪鎭・安鼎漢 등과 당색을 초월하여 교유하였다. 만년인 60세 무렵에 鳳里精舍를 지어 考槃亭 등의 이름을 붙이고 隱居自靖하였다. 송파의 은거는 19세기 후반 대내외적으로 혼란을 겪다가 일제치하로 변한 시대에 대한 현실인식과 대응방식이었다.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송파는 시를 통해 드러내었다. 송파는 101題에 112수의 시를 남겼는데, 시세계는 크게 세 가지 양상을 띤다. 첫째, 松節 지향은 복잡다단한 世事와 일제치하라는 시대현실의 파고를 넘기 위한 修身의 표상을 소나무로 설정하고, 根固・晩翠・直幹 등의 소나무 본질을 자신이 지향하는 덕목으로 표현한 것이다. 둘째, 隱居求道의 志趣는 격동하는 시대현실에 대해 鳳里精舍를 지어 隱居自靖으로 대응하면서, 持敬工夫를 통한 心수양 등의 道學추구를 표출한 것이다. 셋째, 報本追遠의 정성은 충효가문의 후손으로서 선조에 대한 추모를 다짐하며 정려 도모, 비석 설립, 묘지명 찬술, 제각 수리 등의 사업을 실천하여 선조의 미덕을 현창한 것이다. 이러한 송파의 모습은 19세기 후반 의령지역 士人들의 현실인식과 대응방식의 일면을 견지한 것이라 하겠다.
        84.
        201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의 목적은 동와 조휘진(1729-1797)의 생애와 활동을 밝히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正祖가 남명 조식에게 사제(賜祭)하였던 시기를 남명학 부흥의 시발점으로 일컫는데, 그는 이때 남명학파의 중심인 덕천서원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각종 진주 관련 지리지에 그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고, 출중한 인물로 많은 인물과 교유하고 있었음을 밝히고 있으나 자세한 연구가 이루어진 바가 아직 없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함안에 세거하였다. 조선 건국 후 출사를 거부하고 함안에 은거하였던 趙悅, 단종 때의 생육신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趙旅, 임진왜란 때 순사한 趙宗道가 그의 선조이다. 그는 평소 효를 실천함과 동시에 선조의 忠을 드러낸 것 역시 효의 실천으로 보았다. 선조 열 명의 업적을 기록한 『趙氏十忠實錄』은 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남명학의 전수자로서 덕천서원을 중심으로 유림을 규합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의 문집인 『東窩遺集』에 보이는 창화시 및 만사를 통해 그의 교유범위가 퇴계학파와 중앙의 남인까지 포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기개와 절조를 숭상하고 處士的인 학풍을 견지하던 남명학파의 유풍을 그대로 견지하였던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85.
        201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강명석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던 것은 2차례 해외 유학이었다. 첫번째 전환점은 1920년대 중반 그는 일본 칸사이학원 신학부에서 공부하였다. 자유로운 신학 분위기 속에서 그는 기독교 사회사상을 접하였다. 일본 유학시절 그는 비참한 민족 현실을 이해하였고, 한센병자들의 고통을 체험하며 목회의 길을 준비하였다. 일본 유학이후, 강명석은 반기독교운동에 대해 대응하는 한편, 현실과 거리를 두고 있는 교회와 교인들을 비판하였다. 그는 교회가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 사회 현실의 이해와 사회사상의 수용이 필요하다고 인식하였다. 그는 사회사상의 역사적 변천과 성경 속에서 담긴 의미 등을 검토하여 한국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였다. 두 번째 전환점은 1930년대 초 미국 밴더빌트 대학교의 유학이었다. 미국 유학과정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환원사상을 접하였다. 환원사 상은 교회의 일치를 표방하며, ‘성서로 돌아가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는 핵심 내용이었다. 그는 환원사상을 한국교회의 내분과 갈등, 충돌을 넘어서 이 땅 위에 참된 교회를 세우는 개혁사상으로 이해하였다. 이를 통한 교회의 일치는 한국교회의 개혁 방향이란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런 이유에서 강명석은 졸업직후 감리교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였다. 그는 귀국 이후 <그리스도의 교회>를 본격 소개하며 환원운동의 선구자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한국 땅에 세우기 위해 열정적인 활동을 하였다. 비록 환원사상이 보수적 신학으로 평가받음에도 불구하고, 강명석은 한국교회의 내분과 갈등, 충돌을 넘어서 교회의 일치를 지향하며 이 땅 위에 참된 교회를 세우는 개혁사상으로 변용하여 받아들였던 것이다.
        86.
        201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에서는 『寒溪遺稿』를 바탕으로 하면서, 한편 여러 문헌에 남아 있는 한계 관련 자료를 통하여 한계의 삶과 문학에 대해 살펴보았다. 한계는 南冥學을 가학으로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삼종제인 河大觀과 더불어 晉陽의 巨擘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그의 학문에 대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金聖鐸과 내왕한 편지, 그리고 친한 벗 朴挺新의 아들 朴受紋에게 준 시와 서문 등을 통하여 그의 학문을 窺見할 수 있었다. 그의 시는 거의 절반이 내외의 인물들의 죽음에 대해 쓴 것인데, 이들 만시는 한계의 한시 전체의 절반을 넘어서는 것으로 한계의 한시세계를 대표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의 만시는 다만 고인을 애도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하여 한계의 교유 범위와 깊이 등을 이해하는 데로 확장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문장으로도 문중에서 인정을 받아 族譜의 序文을 쓰기도 하였으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遊頭流錄」이다, 일찍이 김성탁에게도 알려져 김성탁이 빌려달라고 할 정도였는데, 그 내용은 대략 세가지 방면으로 나누어서 이야기할 수 있다. 첫째는 하대명이 한시를 酬唱한 흔적을 살필 수 있다는 것이다. 남아 전하는 것이 많지는 않으나 한계가 한시를 지었던 자취는 「유두류록」 곳곳에서 발견된다. 한계는 지리산을 가는동안 다섯 여섯 군데에서 13수 정도의 시를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유두류록」이 선현과 선조에 대한 마음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한계는 지리산에 들어가 고려 때 지리산에 숨어들어가 은거하였던 韓維漢의 자취가 있는 鈒巖과 禮記巖을 둘러보았을 뿐만 아니라, 水精社에 기문을 쓴 것이 지금도 『동문선』에 전하는 權適의 기문과 수정사에 남아 있는 자신의 할아버지의 글씨 등을 보며, 옛날의 선현들과 자신의 조상에 대한 회념을 하고 있음을 보았다. 셋째는 두류산 유람을 통하여 지리산 등산의 철학적 묘미를 말해준다는 것이다. 일찍이 南冥 曺植도 산을 오를 때와 내릴 때의 차이를 통하여 善을 하는 일을 이야기하였는데, 한계는 남명이 한 말이라고 인용하였다. 이 말은 본래 유래가 매우 오랜 것으로 『國語』에서 나온 말이었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말을 鄭汝昌, 李滉 등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등산을 하면서 얻은 교훈이 될 만한 내용을 「유두류록」에서 보여주고 있다.
        87.
        201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澹軒 河禹善(1894~1975)의 생애와 시세계를 고찰할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담헌은 19세기 말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와 근대화의 시대를 거쳐 20세기 후반에 세상을 마쳤다. 한문학이 막을 내린 이후의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樂窩 河弘達 이후 남명학을 계승해온 하동군 옥종면 안계마을이 그의 고향이다. 담헌은 젊은 시절 일제의 단발령에 저항하며 경남의 각지를 떠돌아다녔으며, 이후로도 혼란한 시대에 ‘敬義’로 표상되는 남명정신을 근간으로 선비의 본분을 잃지 않으려 평생 노력하였다. 때문에 그의 시에는 심성 수양, 남명에 대한 존숭과 유교지식으로서의 처세, 강점기 시대의 세태에 대한 개탄 등이 들어있으며, 근대화 시기의 서울 풍경도 담겨있다. 요컨대 담헌의 삶과 문학에서 혼란한 시대를 살아간 마지막 남명학 계승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88.
        201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임운(林芸, 1517-1572)의 표질 이칭(李偁)은 선조 28년(1595, 을미)에 임운의 행 장을 적어, 임운이 서울에서 역학을 논하자 기대승이 탄복한 일, 임운이 서울에서 퇴계 이황과 문난(問難)했을 뿐 아니라 퇴계가 도산(陶山)으로 퇴거하자 찾아가 뵙 고 하룻밤 묵으면서 문답한 일, 임운이 백씨 임훈, 남명 조식, 옥계 노진(盧禛)과 함 께 화림(花林)에 유람한 사실을 특별히 기록했다. 하지만 미수 허목(許穆, 1595- 1682)은 묘갈명을 지으면서, 임운과 기대승, 이황, 조식과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실제로 임운 자신이 남긴 시문에 나타난 학문 태도로 보면 반드시 퇴계와 남명의 맥을 이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임운은 퇴계와 남명의 학맥이 형성되 기 이전에 주자학을 연찬하여 독자적인 학풍을 형성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 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임운의 생애를 살펴보고, 임운이 남긴 부 (賦), 책(策), 논(論) 등을 중심으로 그의 학술에 관해 개괄했다. 임운이 호일계(胡一桂)의 󰡔주역본의계몽익전(周易本義啓蒙翼傳)󰡕을 독파하여, 주희 역학 가운데 상수학을 중시하고 복서에서 의리를 추론하는 방법을 수립하고자 한 것은 퇴계의 학맥을 직접 이은 것이라기보다는 독조(獨造)의 경지가 드러나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89.
        2017.06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생애주기별 맞춤형 치유농업서비스를 적용하기 위하여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치유농업서비스 프로그램에 사용할 수 있는 아동 용 느낌말을 알아보고자 수행하였다. 조사는 2016년 4월 27일에서 5월 10일까지 서울, 전주 초등학교 4,5,6학년 학생 450명을 대상으로 조시를 실시하고, 조사에 정확하게 답한 392명을 대상으로 분석을 하였다. 조사내용은 한국비폭력대화센터에서 제시하고 있는 느낌말 목록(162개,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71개, 욕 구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92개)으로 제시하고, 정확히 알겠다. 보통정도다. 정확히 모르겠다의 3점 척도로 조사하였다. 조사결과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의 목록 중 초등학생 80%이상이 알겠다고 답한 느낌말은 고마운, 즐거운, 행복한, 사랑하는, 감사한, 기쁜, 반가운, 신나는, 감동받은, 편안한, 재미있는, 따뜻한, 뿌듯한, 평화로운, 든든한, 여유로운, 용기나는, 가벼운, 당당한, 자신감 있는, 만족스 런, 차분한, 힘이 솟는, 진정되는, 활기찬, 안심이 되는 , 흥분된, 두근거리는, 긴장이 풀리는, 상쾌한, 포근한, 흥미로운, 기운이 나는, 살아있 는, 느긋한, 감격스런, 개운한, 짜릿한, 잠잠해진, 고요한, 흐뭇한, 평온한, 통쾌한, 들뜬으로 44개 느낌말로 나타났으며, 20%의 학생만이 알 고 있는 느낌말은 원기가 왕성한, 누그러지는으로 조사되었다.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의 목록 중 초등학생 100-80%가 정확히 알겠다고 답한 느낌말은 무서운, 걱정되는, 화나는, 힘든, 심심한, 슬픈, 놀란, 부끄러운, 짜증나는, 외로운, 겁나는, 답답한, 억울한, 두려운, 안타까운, 떨리는, 실망스러운, 지루한, 그리운, 서운한, 귀찮은, 불편한, 속상한, 긴장한, 우울한, 괴로운, 피곤한, 불안한, 지겨운, 민망한, 지친, 쑥쓰러운, 섭섭한, 열받는, 어색한, 질린, 신경쓰이는, 서러운, 오싹 한, 분한, 약오르는, 조마조마한, 멍한, 좌절한, 초조한, 절망스러운, 혼란스러운, 찜찜한, 허전한, 따분한, 섬뜩한으로 51개의 느낌말로 조사 되었다. 암담한, 곤혹스러운, 겸연쩍은은 20%미만의 학생들만 알고 있다고 답하였다.
        90.
        2017.04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의 목적은 진로전환 경험자가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 왔는지 생애사 내러티브를 통해 살펴보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연구참여자가 구술한 생애사를 토대로 진로결정에 대한 인식과 관점, 구체적인 진로 경험, 진로 관련 정체성의 형성 과정 등을 분석하였다. 연구 결과, 연구참여자는 삶의 경험을 통해 현재 자신의 직업에 대한 확장적 안목을 형성하고 직업인으로서의 역량을 강화해 온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여러 차례진로 전환 과정을 거치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으로서의 ‘나다움’을 지향하며 지금의 모습을 형성시켜 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생애사적 관점에서 보면 그가 겪은 진로 경험들은 파편화되고 일회적인 경험이 아닌 현재 그가 갖고 있는 직업인·생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만들어온 소재들이었다. 여기에는 자신의 진로 방향을 변경시킨 생애사적 사건들과 갈등 경험들이 관여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각각의 상황 안에서 의사 결정과 대응의 방식에 따라 진로구성 및 정체성의 방향이 결정되어 감을 알 수 있었다.
        91.
        2017.04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PSC girder bridges, widely applied to bridge and railroad bridge (25 ~ 50 m), are a type of bridge that introduces compressive force in advance to the part where tensile force of concrete is generated. The tension force for introducing the compressive force by inserting the tendon into the concrete is a key element of the structural performance in the PSC. At present, however, measurement and verification of this is indirectly managed through deflection and cracking. However, it has become more necessary to develop practical evaluation methods of prestress force of PSC bridges. In this experiment, a small scale PSC beam with various curvature radii was made. Tension force monitoring with FBG sensor and EM sensor was performed on test members using 3 point flexural loading test. The measured values of the FBG sensors and the EM sensors used in the experiment were analyzed and compared with the measured values of the load cell.
        92.
        2017.01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PSC girder bridges, widely applied to bridge and railroad bridge (25 ~ 50 m), are a type of bridge that introduces compressive force in advance to the part where tensile force of concrete is generated. The tension force for introducing the compressive force by inserting the tendon into the concrete is a key element of the structural performance in the PSC. At present, however, measurement and verification of this is indirectly managed through deflection and cracking. However, it has become more necessary to develop practical evaluation methods of prestress force of PSC bridges. In this experiment, a small scale PSC beam with various curvature radii was made. Tension force monitoring with FBG sensor and EM sensor was performed on test members using 3 point flexural loading test. The measured values of the FBG sensors and the EM sensors used in the experiment were analyzed and compared with the measured values of the load cell.
        93.
        2016.11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교량의 예방적 유지관리 효과를 생애주기비용 절감 측면에서 분석 하였다. 예방적 유지관리는 현재 실시되고 있는 대응 적 유지관리 전략과 대비 되는 유지관리 전략으로 교량의 열화지연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교량의 사용수명을 연장 시키며 생애주기비용을 절 감시키는 유지관리 전략이다. 이러한 예방적 유지관리 효과를 분석하기 위해 교량의 공용연수에 따른 건전도 점수 변화 모델과 FHWA 자료를 바탕으로 한 국내 고속도로 교량의 건전도 점수에 따른 보수·보강 비용 모델을 제시 하였다. 제시한 복수의 모델과 국내외 참고 문헌을 바탕으 로 제안된 예방적 유지관리 항목(청소와 도장)의 비용과 주기를 활용하여 사용수명 100년까지의 표준교량(1,730 m2/교량) 당 생애주기 비용과 향후 20년간의 고속도로 총 유지관리 비용을 산정 하였다. 분석 결과 100년간 예방적 유지관리 활동으로 인해 교량 당 5억원의 절감효과를 볼 수 있으며 현재 예방적 유지관리 활동을 실시할 경우 20년 후(2035년)에는 총 1,837억원, 즉 연간 약 92억원의 비용 절감효과를 볼 수 있는 것으 로 분석 되었다.
        95.
        2016.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연구는 학교와 학교 밖의 공간에 내재된 경험이 어떠한 방식으로 자아존중감, 그 리고 개인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지 성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본 연구는 자서전적 방법과 생애사 연구의 방법론을 활용하였다. 연구자는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따라 자신 이 겪은 에피소드를 내러티브로 구체화하면서 학교와 교회, 그리고 일터에서의 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을 기술하였다. 이러한 시공간의 변화 속에서 관계의 양상을 분석하여 연 구자의 경험을 종합적으로 제시하였다. 생애기술은 ‘공간 #1. 가정과 학교: 낮은 자존감과 무기력한 시절을 보낸 곳’, ‘공간 #2. 집 앞의 교회: 가정과 학교 경험의 연장선’, ‘공간 #3. 새로운 교회, 공간’ ‘#4. 다시 학교로: 갈등과 통합’, ‘공간 #5. 일터: 내면적, 외면적 성장’으로 공간의 변화에 따라 구 성되었다. 이를 통하여 연구자는 무기력 했던 어린 시절, 청소년기에 맞이한 새로운 공 간에서의 경험을 성찰하고 삶을 살아가는 태도 변화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과정을 기술하였다. 또한 인정, 소속감, 봉사정신을 학교와 일터에서 통합하기 위하여 결정한 진학과 진로, 그리고 이 과정에서 겪은 현실의 갈등을 기술하였다.
        96.
        201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변화하는 다문화 환경 속에서 결혼이주여성들의 성공적인 사회적응과 주체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그들의 직업과 일터에 관한 보다 세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에 본 연구는 원어민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경력강사 3명을 대상으로 생애사 연구방법을 통해 그들의 삶과 일, 학습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한 연구의 결과 첫째, 결혼이주여성 원어민 강사의 생애를 통해 모국에서의 삶과 이주 후의 삶, 그리고 원어민 강사가 되기까지의 학습을 통한 성장과 변화를 이해 할 수 있었다. 첫째, 결혼이주여성 원어민 강사들에게 일과 학습은 구분되는 개념이 아니라 생활 그 자체이며 삶의 기반이 되며 일터는 세상과 소통하는 만남의 장이었다. 둘째, 결혼이주여성 원어민 강사의 생애는 슛제의 인생진행의 과정 구조와 반 게넵의 통과의례의 따른 분리, 전이, 통합의 과정으로 분석이 가능하였다. 이들은 삶에 통제력을 행사하는 주위의 상황인 ‘진행 곡선’에 맞서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추진해 나가는 형태를 보였다. 이러한 인생과정은 모국으로부터의 분리단계, 이주 후의 불안정한 백지상태인 전이 단계를 거쳐 원어민 강사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통합의 단계에 이르렀다. 통과 의례 제 단계들에서의 경험과 학습들은 결혼이주여성들을 역량 있고 좋은 사람, 자신감 있고 참을성 있는 사람,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원어민 강사로 성장하게 했다
        97.
        201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노동이주에서 유학이주로 재입국한 외국인 이주자가 정체성을 어떻게 확립하 는가를 살펴보고 생애사를 재구성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점차 복잡화되고 장기화되는 한국 사회 이주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개별 사례들을 연구할 필요성에서 출발한다. 네팔에 서 고등학교를 졸업 후 한국에 온 이주자는 노동이주 기간 동안 문화적 충격과 신체적 폭 력 경험하였고, 기독교 문화를 접하면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 기독교인들과의 관계망을 형성하여 한국 사회 적응하였으며 이후 신학 공부를 위해 재이주하였다. 유학이주를 준비 하기 위해 네팔에 있는 동안 이주자는 한국과 네팔 두 사회를 비교하면서 한국의 경제 발 전의 원동력에 관심을 두었다. 이후 한국에서 학사부터 박사학위 수료까지의 유학 경험을 통해 그는 교육과 종교를 한국 경제 발전의 요인으로 파악하였다. 외국인 노동자에서 외국 인 유학생과 한국 교회 내 전도사로써 신분과 역할이 바뀌면서 네팔인 이주자는 자신의 교육적․신분적 성취를 통하여 ‘애국심과 신앙심 심어’ 네팔 발전에 봉사할 능력 있는 인 재를 양성하기 위해 스스로를 종교인-교육자로 준비시켰다. 이 사례는 국가 발전을 추구하 는 교육 이데올로기가 이주자를 매개로 한국보다 덜 산업화된 국가에 전파되고 있음을 보 여준다.
        98.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케네스 스콧 라투레트(Kenneth Scott Latourette, 1884-1968)와 그 의 박사과정 제자인 찰스 데이비스 스톡스(Charles Davis Stokes, 1915-1998) 의 간추린 생애와 역사서술 방법론에 대한 연구를 목적으로 한다. 가장 먼 저 필자는 역사적 인물들인 이 두 사람들의 생애를 간략히 다루었다. 학생 해외선교 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의 영향을 받은 라투레트는 중국선교사, 선교역사가, 그리고 세계교회연합주 의자(ecumenist)의 삶을 살았다. 스톡스는 한국선교사였던 아버지의 아들로 어린 시절을 한국에서 보냈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후 다시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농촌계몽운동과 대전감리교신학교(현, 목원대학교) 의 설립자와 교육가로 활동했다. 라투레트의 역사서술 방법론은 크게 “한계인정, 초월성, 상호작용” 이렇 게 세 가지 특징으로 요약될 수 있다. 객관적 역사서술을 지향하는 라투레 트는 객관적인 역사연구를 위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인정하는 것 으로부터 연구를 시작했다. 또한 그는 지역, 교파, 그리고 교회를 초월하고 자 시도했다. 즉 유럽중심적, 특정 교파중심적, 교리중심적 교회사의 한계 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회, 동방정교회, 개신교회 를 포함하고 북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지역들을 포괄하는 기독교역사 서술을 의도했다. 다시 말해 기독교역사는 그리스도 복음의 확 장과 영향을 다룸으로써 교회중심적 역사를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고 라투 레트는 생각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스톡스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라투레트의 이러한 세 가지 역사서술 방법론들 중에서 적어도 한계인정과 상호작용이라는 두 가지 특징은 받아드린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지도교수가 그랬던 것처럼, 스톡스도 자신의 연구를 시작하면서 역사적 객관성을 위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연구를 시작한다. 게다가 스톡스는 기독교 선 교에 있어서 복음 전파자와 수용자의 상호작용의 영향을 강조한 라투레트 의 영향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톡스의 유일한 역사 연구서인 자 신의 박사학위 논문이 1885년부터 1930년까지 진행된 미국감리교회의 한 국지역 선교에 한정되기 때문에, 스톡스가 라투레트의 초월성에 관해 영향 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는 파악하기가 어렵다.
        99.
        2015.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倻溪 宋希奎(1494-1558)는 佔畢齋 金宗直, 寒暄堂 金宏弼, 新堂 鄭鵬, 松堂 朴英, 杏亭 都衡 등의 인물이 영향을 끼친 星州에서 태어나 고 자라서 출사하고 만년을 보냈던 인물이다. 야계와 사마시 동년이었 던 晦齋 李彦迪 및 7년 연하인 南冥 曺植과 退溪 李滉 등이, 학문적 역량을 크게 드러내었던 시대에 이들과 같이 살면서, 어떠한 삶을 살면 서 어떠한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은, 성주의 학술사 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거니와, 영남의 유학사 및 나아가 우리나라 조선초기의 유학사 내지 정신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작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816년에 초간 목활자본이 나오고 1924년 중간 목판본이 나올 때까 지 남아 전하는 작품이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냥 묻어두기에 는 우리 유학사 내지 정신사의 한 부분을 빠뜨려 두는 일인지라, 이에 대한 연구는 꼭 이루어져야 할 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이 논문에서의 논의를 요약하여 정리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야계의 가계는 시조로부터 9세에 이르기까지는 합천 야로 지역 에 世居하다가 야계의 6대조인 관찰사 宋構가 성주로 이거함에 따라 성주 사람이 되었다. 야계는 대대로 중앙 관직을 역임한 유력한 가문의 후예로서 어릴 적에 杏亭 都衡으로부터 학업을 익혀 20세에 진사가 되고,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중앙의 청현직을 두루 거치고 지방직으 로는 상주목사, 김해부사, 대구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상주목사에 재임 때 문과 동년인 金光準이 사욕을 부리려는 일에 동조해주지 않음으로 해서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고, 명종 즉위 초에 司憲府 執義로 있으면서 文定王后의 밀지에 따라 尹任·柳寬·柳仁 淑 등의 세 대신을 처형토록 하는데 합의하자는 大司憲 閔齊仁과 大司 諫 金光準의 견해에 목숨을 걸고 반대한 것으로 인해, 54세 때 대구부 사로 재직하던 중에 良才驛 壁書事件이 일어나자 乙巳名人들이 다시 대거 화를 당하였는데, 이 때 야계도 전라도 高山으로 유배되었다. 58 세 때 放還되어 高山亭을 지어두고 65세까지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둘째, 야계의 문학은 그의 삶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孝敬忠信을 체득 하여 실천하는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공자의 제 자 曾晳에게서 보이는 유유자적함과 물아일체를 만끽하는 浴沂風雩의 삶을 추구하였음도 확인하였다. 이 두 가지 면모는 조선 초기 유자로서 의 전형적인 삶의 양식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요컨대 야계는 관직 생활에서 사림으로서의 확고한 자세를 일관되게 유지함으로써 이른바 을사명인으로서 후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퇴처한 뒤 향리의 생활에서는 효제충신과 욕기풍우의 자세를 지니고 유유자적함으로써, 15세기 전반기 사림의 한 전형을 보여주었다고 할 만하다.
        100.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眞庵 李炳憲은 조선말기의 개혁적 유학자다. 본래 俛宇 郭鍾錫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유학의 개혁을 통한 구국에 뜻을 두고 중국 강유위의 제자가 되어 今文經學을 공부하고 孔子敎운동을 전개했다. 西歐文物이 밀려들어오고 日本의 침략 마수를 뻗기 시작하던 19세기 후반기에 태어나 儒敎가 급속도로 망해가고 우리 傳統이 무너지는 것을 직접 목도하며 성장하였다. 그래서 유교를 復原할 수 있는 방안으로 유교를 종교화 하여 孔敎라 이름하고, 孔子를 敎祖로 삼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공교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기 위하여 今文經學을 공부하였다. 그는 국권을 회복하고 백성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유교라고 확신하였는데, 그 유교는 우리 나라에 두루 퍼져 있는 宋學이 아니고 孔子의 가르침을 원래 모습인 孔敎였던 것이다. 유교가 개혁을 통해서만 민족을 이끌 수 있고 전통문화를 지켜 나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孔敎運動은, 培山書堂에 文廟를 지어 孔子를 享祀하는 정도에서 그치고 말아 실제로는 크게 확산되지 못 했다. 시대변화에 무관심한 保守儒林들의 악랄한 반발로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 했다. 그런데도 그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한 평생 孔敎運動에 헌신하였다. 비록 그의 孔敎運動은 성공을 거두지 못 했지만, 그는 韓國儒敎史上 가장 독특한 유학자요 사상가요 종교이론가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저서를 남겨 그의 유학사상을 수록했는데, 이는 韓國思想史에 새로운 경지를 연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康有爲의 大同思想을 바탕으로 華夷觀을 극복하고 四海同胞主義를 제창하였고, 變法自疆에 의한 국가발전을 도모하고, 민족의 自矜心을 고취하였다. 그는 孔敎運動을 통해 우리 민족을 보존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韓國學述史上 본격적인 今文經學者이다. 또 今文學에 바탕하여 儒敎經典을 재해석하여 『易經今文考』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이는 韓國經學史上 독특한 업적이다. 朱子學 일변도의 한국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보수적 유림들의 극렬한 반발 아니라 해도, 급속하게 변하는 시대조류에 孔敎를 통한 儒敎의 復原과 民族의 自尊의 추구가 실효를 거두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었다. 아무튼 眞庵은 많은 儒學者들 가운데서도 가장 독창적인 학자고, 금문학을 도입한 특이한 학자고, 서양의 학문도 선구적으로 상당히 이해하였으며 당시 중국 사정이나 학계의 동향을 가장 잘 아는 학자였다. 일본과도 무조건적인 투쟁이 아닌 설득을 통하여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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