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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루터의 만인사제설은 일반 시민도 사제가 된다는 믿음을 성경을 통하여 확인 시켜 주었다. 김흥호는 목사들이 가졌던 세속적 권리를 포기했다. 김흥호는 다석을 만나 후에 35세에 시간 제단 즉 가온찍기라는 근본 체험을 한 후에 한 끼만을 먹는 약속을 하나님에게 했으며 이런 결심은 자아가 매 순간 죽는 고난이며 십자가의 길임을 보여주셨다. 루터는 교회의 권력을 시민에게 양도하는 혁명을 일으켰고 내면의 신앙을 국가가 침범하지 않으면 저항하지 않는다는 신앙을 보여주었다. 루터는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혁명을 이룬 존 칼뱅과는 다르게 내면의 신앙을 지키며 내면에 계신 천국을 보여 주었다. 루터와 김흥호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공통된 신앙을 가졌으나 김흥호는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권력을 남용하거 나 부패한 국가에 김흥호가 저항하지 않은 것은 탐욕이 가장 큰 죄라고 그는 보았기 때문이며 그래서 세상의 법으로 인간을 통제하도록 한 것이며 그것이 루터의 입장이다. 김흥호가 한 끼를 실천한 신앙은 말과 행위를 일치한 다석의 신앙을 실천한 제자라는 증거이다. 김흥호는 서양의 기독교를 한국의 문화와 역사 속에 내재화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동서양의 고전에서 찾고 실천하여 동양화한 기독교를 실현했다. 그는 가톨릭의 부패에 저항한 루터의 개신교 정신으로 그리스도의 사 랑과 평화를 실천하기 위하여 타종교를 수용하고 마음속에 있는 천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느끼면서 한국과 동양의 전통을 수용한 참 기독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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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8.04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마르틴 루터는 성직만이 아니라 신앙으로부터 유래한 세상의 모든 직업 이 하나님의 소명에 의한 것이라고 보았고, 이신득의에 근거해서 신앙으로 부터 유래한 모든 일이 선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상업에 대해 공정한 거래와 경제적 형평성을 주장했고, 그 당시 사치와 쾌락을 위한 해외 무역과 독점에 대해서는 비판했다. 루터는 산상설교에 따라 이자를 받는 것을 금했지만, 세상 왕국에서는 5%정도의 이자 받는 것을 인정했다. 루터는 고리대금과 함께 토지를 통한 지대수익을 금지했고, 지대(zinss) 와 지대수익(zinsskauf)을 통해 누리는 불로소득을 환수하여 다른 세금을 대신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급진주의자들이 주장하던 재산의 공유화를 비판하고 사유재산 제도를 인정했다. 그는 가난한 이웃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발적인 사랑과 봉사를 강조했으며, 정부가 가난한 자들을 보살펴 주고 가난한 아동들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했다. 결국, 루터의 경제사상은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사회약자를 보호하는 희년사상을 계승했다. 경제사상에 있어서 루터의 가장 큰 관심은 공평과 정의였기 때문이다. 그의 경제사상은 그 당시 교회 안에 국한된 교훈적 가르침만이 아닌, 교회와 사회, 도시와 제국 전체를 향한 제도적이며 구조적 차원의 변화와 실천적 가르침이었다.
        3.
        2018.04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웨슬리에게서 나타나는 루터 신학의 흔적을 원자료를 중심으로 추적한 연구이다. 그동안 루터와 웨슬리는 칭의와 성화에 상반된 강조를 했다고 서술해왔다. 그 결과 루터를 칭의의 신학자요, 웨슬리를 성화의 신학자라고 칭하고, 이 둘 사이에 커다란 신학적 괴리를 만들었다. 심지어 루터는 이신칭의를 발견한 공은 있으나, 성화에 대한 강조가 없다고 평가절 하하는 반면, 성화를 강조한 웨슬리를 종교개혁의 완성자로 과대평가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루터와 웨슬리는 다름이 아니라 같음의 카테 고리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웨슬리가 말하는 사회적 성화에 대한 단초는 루터의 『선행에 관하여』(1520), 『그리스도인의 자유』(1520) 등 여러 글에서 충분히 발견된다. 성화에 대한 루터의 언급도 『교리문답서』(1529)에 충분히 개진되어 있다. 웨슬리에게서 발견되는 칭의와 성화에 관한 신학적 출처는 그 단초가 종교개혁, 특히 마르틴 루터의 신학에 있다. 따라서 이 논문의 목적은 루터와 웨슬리 사이에 매개물을 찾고, 웨슬리 신학에 등장하는 루터신학적 접점을 찾는데 있다. 접점이란 만나면서 살짝 스치고 다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루터와 웨슬리의 신학적 스펙트럼이 넓고, 제한된 지면은 모든 것을 다루기에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칭의와 성화라는 주제로 제한했다. 사실 루터의 칭의론은, 웨슬리 도 이점에서는 마찬가지이지만, 독립된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죄, 인간, 은총 등 기독교 신학의 핵심 영역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소논문에서는 또 다른 신학적 영역으로의 확장을 자제하고 칭의와 성화의 이해만을 다루었다. 루터와 웨슬리는 칭의와 성화에 대해 같은 틀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서로 다른 결과에 이르렀다. 루터는 칭의와 성화를 서로 다른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반면 웨슬리에게는 순간적 요소와 과정적 요소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그렇지만 칭의와 성화를 하나님의 행위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둘 모두에게 공통된 사항이다. 논문의 의의는 칭의와 성화에 대한 루터와 웨슬리 신학을 이해하는데 루터와 연관된 통전적인 시각을 제공하는 점에 있다.
        4.
        201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중국 지 식계층에 의해 처음 소개된 내용부터 그 이후의 변화된 루터의 이해를 고 찰하는 것이다. 중국 지식인들에 의해 소개된 루터는 중국의 사회적, 정치 적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극단을 오고 가는 다양한 형상으로 부각되었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중국에 처음 소개되는 루터의 형상은 천주교에서 개신교를 분립시킨 종교적 “창시자”이었다. 이 시기는 중국 개명 지식인들 이 나라의 부패와 무능에 대해 통한하던 시기였다. “중화”라는 폐쇄적인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세계무대에서 강력한 대국을 꿈꾸는 청나라 지식인 들에게는 루터는 단지 천주교라는 독제적인 종교 구도에서 개신교를 분립 해낸 “종교적 창시가”일 뿐이었다. 그러나 중국 근대 계몽운동 및 정치개혁의 시작을 알리는 19시기 말 유 신운동과 20세기 초 신문화운동의 과정에서는 중국 지식인들에 의해서는 “혁명적 개혁자”로 칭송받았다. 유신운동가들은 중국의 부패와 무능을 해 결하기 위해서는 서방의 우수한 체계를 유입하고 개혁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 구체적인 개혁의 일환으로 개신교를 모방한 공교를 회복하고 부흥시키 는 것으로 보았다. 때문에 유신 지식인들은 유신운동이 실패한 이후 자신들이 이룩하지 못한 개혁의 욕망, 실패에 따른 심리적 방어로 루터를 “혁 명적 개혁가”로 이해하였다. 신문화운동 거장들은 공교를 미신하는 유신운동가들과 정반대로 종교를 국민을 세뇌시키는 아편과 같은 존재로 혐오하였기에 천주교 교황의 전횡 에 대항한 루터를 혁명가로 높게 평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루터의 종교개 혁가의 색채는 제쳐놓고 오로지 혁명가의 측면만 강조한 것 역시 신문화운 동자들의 주관적이고 편집 취사적인 이해이기도 하다. 하지만 20세기 초부터 60년대까지 실질적으로 무력으로 혁명을 강행하 는 신해혁명 및 공산주의 혁명에서는 오히려 혁명가들에 의해 혁명을 반대 하는 “반혁명 배신자”로 낙인이 찍히고 강렬한 성토를 받게 되었다. 특히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집권한 이후 끊임없는 정치 이데올로기운동 속에서 루터는 꾸준히 혹평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계급 분석 방법”이라는 틀 속에서 엥겔스의 루터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인 작용을 한 것이다. 종교개혁을 계급투쟁의 차원에서 자리배김하고 독일 농 민전쟁을 계급혁명의 차원에서 평가할 때 루터의 사상과 행적은 “반혁명 배신자”로 이해하기에 충분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20세기말 개혁개방을 맞이한 새로운 역사적 상황부터는 “인문적 사상 가”로 루터의 형상이 새롭게 수립되고 있다. “계급”과 “혁명”이라는 주제 가 사라지고, 더불어 아직도 공산주의사상이 지도사상인 중국 공산당 집권 속에서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이 지속되는 중국 당대의 시대 환경에 서 필연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루터에게서 “혁명”과 “종 교”라는 주제를 제외하면 남는 것은 오로지 “인문”이 아닐까? 개혁개방 이 후 현재까지 “인문적 사상가”로 새롭게 수립되는 루터의 형상은 현재진행 형이라고 할 수 있다.
        5.
        201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의 연구목적은 루터의 죽음관을 살펴보는 것이다. 기존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입장과는 달리 루터의 죽음관이 드러내는 가장 큰 특징은 루터가 죽음의 문제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는 그의 핵심적 개혁 사상을 가지고 풀이한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서 루터는 이 개혁 사상에 의거하여 중세 구원론과 종교적 관행에 불가결한 요소였던 연옥 사상을 결국 거부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는 관점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인과 관련하여 두 종류 의 죽음―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인생 중에 경험하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죽음과 인생의 끝을 의미하는 죽음―을 이야기한 다. 전자의 죽음은 후자의 죽음의 형태와 그 이후 누리게 될 부활과 영생 의 불가피한 조건이 되는 만큼 루터의 죽음관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 지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이 두 형태의 죽음은 두 형태의 부활 과 연결된다. 루터는 죽음 이후 불멸하는 영혼이 즉각적으로 심판을 받고 천국이나 지옥이나 연옥으로 옮겨진다는 중세 후기 교리 대신 부활 때까지 죽음은 잠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잠으로서의 이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첫 번째 창조 때보다 훨씬 더 영광스럽고 아름답게 만들어질 두 번째 창조를 위한 중간과정이라는 점에서 두렵고 끔찍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과 의 영원한 삶을 위해 거쳐야 할 꼭 필요한 통과의례가 되며 이 세상에서 겪은 모든 죄와 죽음과 악과의 싸움에 대한 최후 승리를 의미한다.
        6.
        2016.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오직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 이 표어는 종교개혁의 중심원리 가운데 하나로서 다른 모든 신학적 원리들의 가장 기초가 되는 원리(prima principium)이다. 그러나 종교개혁기에 있어 다양한 논쟁적 상황에서 볼 때, “오직 성경만으로”라는 이 표어가 가지는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신학적, 실천적 의미들은 더욱 세분하여 정확하게 논구될 필요가 있다. “오직 성경만 으로”라는 종교개혁의 원리는 신학적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세부적인 교리로 구성됨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1) “성경의 충분성(sufficientia)” 교리와 (2) “성경의 명료성(claritas, or perspicuitas)” 교리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 가운데 특히 두 번째인 “성경의 명료성” 교리가 가지는 실제적이고도 중요 한 의미들을 루터의 신학을 중심으로 연구 고찰한 것이며, 또한 이것이 그의 종교개혁신학의 정립 과정과 성경해석 원리 및 여타 다른 종교개혁 원리들에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구체적으로 구현되고 작동되었는지 살펴 본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신학에 있어 특별히 ‘성경의 명료성’ 교리와 관련하여, (1) 인식적 원리(epistemological principle), (2) 신학적 원리(theological principle), (3) 해석학적 원리(hermeneutical principle), 그리고 마지막으로 (4) 실천적 원리(practical principle)로서의 그 실제적인 작용과 구체 적인 함의들을 구분하여 고찰한 것이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우리는 ‘성경의 명료성’ 교리가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과 그의 종교개혁운동이 진전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여러 신학적 논쟁 과 신앙적인 투쟁의 국면들에 있어 다양한 기능의 역할과 함의들을 함축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본 논문의 분석에 따르면, 루터에게 있어 그것은 먼저, (1) 신학적 인식과 실천을 위한 명확한 확실성을 담보하는 근원적인 “인식론 적 원리”(epistemological principle)로 작용하고 있으며, (2) ‘십자가의 신학’의 정립을 위한 ‘그리스도와 복음 중심’의 성경해석의 “신학적 원리”(theological principle)로서 기능함과 동시에, (3) 종교개혁신학의 체계화를 위한 구체적인 성경해석 방법론을 구축하는 “해석학적 원리”(hermeneutical principle)로 작 동하고 있고, 마지막으로 (4) ‘말씀의 선포(설교)와 성례전의 개혁’, ‘전성도의 제사장직과 교회 직분의 개혁’,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소명론’과 일상의 삶의 개혁에 이르기까지 종교개혁신학의 핵심적인 “실천적 원리”(practical principle)들의 기초가 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아가 현대 성경해석학 적인 위기의 상황 속에서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그들의 종교개혁신 학을 정립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초원리(prima principium)로 삼았던 “성경 의 명료성”(claritas Scripturae) 교리와 그것이 함축하는 올바른 성경해석 원리 들을 창조적으로 복원하여 더욱 발전적이며 체계적으로 적용하는 깊이 있는 연구가 더없이 중요하고 긴급하게 필요하다 할 것이다.
        7.
        2016.04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루터의 성령이해를 다루었다. 루터는 고대교회의 삼위일체 이 해를 계승하고 있고, 삼위의 관계나 본질에 대한 다른 견해를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성령의 활동에 대한 이해는 그에게 매우 중요했다. 왜냐하 면 종교개혁 진영 내부에서 개혁의 정당성을 성령의 직접적인 지시나 내적 명령에 두는 사례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 주된 논의의 유발자는 칼슈 타트와 토마스 뮌처 그리고 소위 츠비카우 예언자들이었다. 이들은 행동의 근거를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와 내적 지시에 두며, 개혁의 방향을 주관적 으로 선회하려고 했다. 평신도들에게 성령의 소유를 촉구하며, 성령의 지 시를 받는 자신들만이 참된 하나님의 종이라고 주장했다. 이들로 인하여 루터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숙고했으며, 성서를 토대로 상세히 반박했다. 루터에게는 내적인 깨달음보다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 이 더 중요했다. 그는 성령의 역사를 말씀보다 앞세우지 않았다. 성령의 역 사에 대한 루터의 사유는 대체로 1520년대 초기와 중반에 열광주의자들과 의 대립 속에서 계속 형성되며, 1520년대 후반에 집중적으로 발간된 󰡔고백󰡕, 󰡔대교리문답서󰡕, 󰡔소교리문답서󰡕 그리고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에 표명되어 있다.
        8.
        2013.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is article is an attempt to inquire into the doctrine of papal primacy in Gregorius VII and Martin Luther, focusing on their biblical interpretations of Matthew 16:18-19 and John 21:15-17. Gregorius VII refers to these passages as the scriptural evidence for Petrine primacy and monopolistic privileges. Furthermore, unambiguously revealing an invincible conviction of himself as the vicar of Christ and Peter's successor, Gregorius VII materializes an unprecedented form of papal primacy, not only in theory but also in practice. He plays his role as the head in the secular realm as well as in the spiritual one. He demands the kind of obedience that should be shown to Christ or St. Peter, the Prince of the Apostles, from both religious and secular leaders. Luther advances divergent interpretation of these passages. The significant characteristic of his interpretations is that they are Christological, or more precisely, Christocentric. This reveals that the essence of Luther's Reformation thought, that is, his theological stance on Jesus Christ and faith in him, is functioning as the interpretive key to these passages. The “rock” is defined as Jesus Christ or faith in him. He builds a Christian community comprised of those who believe in him. So Christ is the sole head of this spiritual community of believers, who properly wield the power of the two keys to bind and loose sins. Luther argues that, when Jesus asked Peter to tend his sheep, his command is irrelevant to papal primacy in both spiritual and secular realm. Luther pays heed to the question “Do you love me?,” which Jesus Christ asked Peter three times. Based on this question, Luther contends that no one can tend Christ’s sheep without loving him genuinely in the first place. Tending Christ’s sheep means following his steps and offering voluntary service to others.
        9.
        2013.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Die Leipziger Disputation von 1519 stellt einen Höhepunkt in der frühen Reformationsgeschichte dar. Die Bedeutung der Leipziger Disputation liegt in der heftigen Auseinandersetzung über der kirchlichen Autorität, vor allem den päpstlichen Primat. Diese Arbeit zielt darauf ab, die Leipziger Disputation aus Sicht der Autoritätenfrage zu verstehen und deren reformatorische Bedeutung herauszufinden In der frühen Phase der Reformation ging es um den Autoritätenkonflikt. Zwar begann Luthers Konflikt mit der römischen Kirche, wie 95 Thesen gegen den Ablass von 1517, mit der Ablasskritik, aber dabei ging es wesentlich um die Autoritätenfrage. Das Zentrum der causa Lutheri, die sowohl bei Prierias als auch vor Kardinal Cajetan behandelt worden war, lag in der gültigen Autoritätenfrage. Luther erregte Debatten mit J. Eck über die Autorität von Papst und Konzil und bestreitete diese. Hierbei behauptete Luther, dass der Papst bzw. der Konzil irren könne und kein göttliches Recht behalte. Für Luther ist etwas heilsnotwendiges für die Christen keine kirchliche Instanz wie Papst, sondern nur die Heilige Schrift. Luther hat mit der Autorität der kirchlichen Institutionen auch ihre Lehren und Satzungen sowie kirchliche Traditionen relativiert. In der Leipziger Disputation ging es Luther um die Unterscheidung zwischen Gotteswort und Menschenwort sowie zwischen göttlichem Recht und menschlichem Rec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