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udy on Lee, Gahwan's Interest of the Name of a Thing and Practice -Focused on 『Jeongheonswaerok(貞軒瑣錄)』 and 『Jabseul(雜說)」-
정헌 이가환의 물명에 관한 관심과 그 실천 -『정헌쇄록』과 『잡설』을 중심으로-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한자를 유입하여 표기 문자로 사용하였지만, 중국과 달리 표기문자와 음성 언어를 달리하는 이원적 구도를 지니고 있었다. 조선시대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도 한자가 표기문자의 대표적 수단이었기 때문에, 지식인들 은 한자나 한자어로 된 물명을 어떠한 우리말로 대체시킬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조선후기 실학자들은 소중화의식의 확장․고증학의 발달 등의 영 향으로 철학적 담론이나 경세적 주제 외에도, 자학․물명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 다. 그 과정에 물명을 우리말로 풀이한 다양한 저서 『物譜』․『才物譜』 등이 출현 하였다. 그런데 과연 18세기 조선사회에서 통행되고 있던 한자나 한자어로 된 물명이 과연 우리말과 일치했던 것일까? 아울러 당시 통용되었던 물명류의 저작이 과연 철저한 고증을 거치고 오류를 시정한 다음 저술된 것일까? 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본고는 이점에 유의하여 李家煥(1742~1801, 자 廷藻, 호 貞軒․錦帶)을 주목 하고자 한다. 이가환은 茶山 丁若鏞(1762~1836)과 함께 18세기 조선의 대표적 실학자이다. 하지만 1801년 辛酉邪獄에 연루되어 죽음을 맞이했던 비운의 인물이 기도 하다. 그는 문학이나 천문․수학 방면에서 두각을 드러내면서 正祖(1752~ 1800)에게 깊은 신뢰를 받았다. 이 외에도 그는 한자교육과도 관련 있는 자학이나 물명에도 관심이 깊었다. 이에 필자는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이가환의 저작 『貞軒瑣錄』과 「雜說」을 중심으로, 李家煥의 物名에 관한 관심과 그 실천적 면모를 살펴 보고자 하였다. 『정헌쇄록』은 일본 동양문고 『東稗洛誦 續』에 전하고 있고, 「잡설」 은 국내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詩文艸』에 수록된 것으로 두 저작은 상호 관련 된 작품이다. 『貞軒瑣錄』과 「雜說」은 물명류의 저서 형태를 띤 것도 아니고 물명 을 우리말로 직접 풀이한 것도 아니다. 『정헌쇄록』은 이가환의 독서 잡기류로, 그 안에는 의복․음식․제도․가옥에 관한 기록 외에도 우리말과 물명의 어원을 고증 한 부분이 있다. 이에 반해 「잡설」은 한자나 한자어로 된 물명 등에 대한 정확한 재해석과 오류 시정이 핵심을 이룬다. 곧 이가환은 이 두 저작에서 물명의 원뜻은 무엇이고 우리말은 무엇인가를 철저히 고증하면서, 18세기 時俗에서 잘못 사용하 고 있는 오류를 지적하고 보완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 두 저작에는 학문 제영역 과 일상에서의 이가환의 철저한 탐구심과 고증적 학문태도가 돋보인다. 아울러 당 대 이루어지고 있는 物名에 관한 문제점과 방향도 읽을 수 있다. 이가환은 철저한 고증을 토대로 물명을 비롯하여 기타 영역에서도 原義를 철저 히 궁구하는 학적 자세가 필요하며, 절대 오류를 답습하거나 견강부회를 하는 식의 학습태도를 지양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물명이나 기타 한자어 연구는 단 순 물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을 영위하는 예절과 교양이면서 국가의 경영 곧 백성들의 목숨을 좌우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가환이 제기했던 이 같은 문제의식과 방향은 비단 物名 분야에 국한된 문제일 뿐 아니라, 학문 제반 영역에서 궁구해야할 자세로 생각된다. 이 외에도 『정헌쇄록』과 「잡설」 은 1795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丁若鏞의 『竹欄物名考』(19C)․李學逵의 『物名類解』(19C)․柳僖의 『物名攷』(1824年) 등의 저작에도 영향을 주었다. 곧 이가환은 1801년 삶을 마감했지만, 그의 정신과 학문은 그의 조카 이학규․후배 정약용 등에 이어져 조선후기 실학의 또 다른 지류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漢字轉入以來,朝鮮地區裏標記文字與音聲言語同時存在, 因此朝鮮的語言俱有了雙重性。韓文文字創製以後, 漢字仍然作爲代表性的標記文字, 卽記錄文字的代表手段。所以標記文字與朝鮮語發音實際之間出現了混亂, 同時漢字(物名)與朝鮮語之間也出現了難以符合的現象。正因爲這樣在朝鮮後期小中華意識被擴大、考證學開始發展、以朝鮮語(包括方言)‘名物度數’被得到關注, 出現分析物名的著作以及物名分類的書籍, 例如≪物譜≫(1770年起稿, 1802年完成)、≪才物譜≫(1792年)、≪竹欄物名考≫(19世紀)、≪物名類解≫(19世紀)、≪物名考≫(1824年)等多數有名書籍。但是物名類的著作是否經過考證呢?流傳到朝鮮時代的漢字物名和原本的朝鮮語是否符合呢? 是否是同樣的事物呢? 這些問題至今還未解決。本論文考察了有關於李家煥關注到的這幾個問題。李家煥(1742~1801, 字 廷藻, 號 貞軒、錦帶)是朝鮮後期的實學者, 在1801年發生辛酉士禍時, 因爲他也是西學派的人物, 所以遭受不幸身亡。李家煥在字學、物名方面卓越、但是在具體硏究方面不够完善。本論文以李家煥作品中的≪貞軒瑣錄≫ (日本東洋文庫所藏本, 考證朝鮮的風俗、制度、人物、數詞、地名、言語等)與 <雜說>(韓國國立中央圖書館所藏本, 考證物名、矯正錯誤的代表著作)爲中心, 探討了18 世紀漢字與朝鮮語的關係及當時物名上的問題和方向。首先, 本論文通過考察李家煥的祖先李瀷(1681~1763, 號 星湖)、父親李用休 (1708~1782, 號 惠寰)、族父李嚞煥(1722~1779, 號 例軒)、外姪李學逵(1770~1835, 號 洛下生)的實學思考方式與字學、物名硏究, 探究了一個家門的實學傳統。其次, 通過≪貞軒瑣錄≫、<雜說>, 考察了貞軒的考證學問態度, 還有18世紀物名上的問題與敎育方向。李家煥在文集中感慨了‘鹵莽如此’․‘襲謬如此’․‘無稽無理’, 批判了抄襲錯誤、牽强傅會的硏究態度。他經過考證原義、反映實際言語生活的方式, 强調了禁 止使用不符合禮節的述語、詩文裏使用錯誤的言語文字、使用錯誤的藥方而致患者死亡。李家煥觀察日常起居中的一些小事物以及事物名稱, 經過考證而找到線索, 終于得出最終正確的結論, 他這樣嚴謹的學問態度對我們有很大的啓發。因爲對物名或其他漢字詞彙的硏究, 不止儘限於物名方面, 而可以影響到禮節、素養、經營國家等有關老百姓生活以及生命的問題。雖然他差一歲未能活到花甲之年就去世了, 可是他的學問態度和求學精神還是流傳到侄子李學逵和晩輩丁若鏞等人物, 形成了朝鮮後期實學的一股熱流。到了二十一世紀我希望在漢字、漢文的敎育問題上, 繼續考察十八世紀與李家煥相關的漢字敎育意識, 幷能够吸收他的學問態度和求學精神。
The Joseon Dynasty had dualism of written letters and vocal language since inception of Chinese character. Scholars had concern on how to translate the Chinese-charactered name of things into Korean because it is common to use the Chinese character even after Korean character was invented. Especially the Sillhak scholars of the late Joseon Dynasty were studying not only the philosophical discourse but also the graphonomy and the name of a thing and they were influenced by the growth of little Sinocentrism perception and a bibliographical study of Chinese classics. During this process, they produced many kinds of books in which Korean name was translated into from Chinese name. For example, the books of 『Mulbo(物譜)』 and 『Jaemulbo(才物譜)』 were written. But there is still some questions. First, “Is the name of a thing in Chinese character matched exactly with the spoken Korean in 18th century”, Second,“Is this book of the name of a thing written after thorough historical research and revising errors”. I will give an attention to Mr. Lee, Gahwan(1742 ~1801) based on this point. Lee, Gahwan is a representative Silhak(實學) scholar with Jeong yakyong(1762~1836) of the 18th century. But he is a misfortune man killed in the involvement of Sinyuoksa(1801). He made his mark in the literature, astronomy and mathematics, and was trusted very much from King Jeongjo. Above this, he was interested in the graphonomy and the name of a thing related much with Chinese education. So I have an intention to study Lee Gahwan's interest of the name of a thing, focusing on 『Jeongheonswaerok(貞軒瑣錄)』 and 「Jabseul(雜說)」 which did not receive attention. 『Jeongheonswaerok(貞軒瑣錄)』is remained in Dongyangmungo of Japan and 「Jabseul(雜說)」 is handed down only in Simuncho of Korea national library, and these two books are inter-related closely. 『Jeongheonswaerok』 and 「Jabseul」 have no structure of the name of a thing and don’t explain the name of a thing in Korean language. 『Jeongheonswaerok』 and 「Jabseul」 is not the book like books showed above which explain the meaning in Korean language. Jeongheonswaerok is a kind of short book report and in this book there is the part which explains the apparel, food, system, hosing, and the etymology of Korean and Chinese-charactered names. 「Jabseul」 focused on the exact reinterpretation and correction about the Chinese- charactered names. He verified what is the original meaning of the name of a thing and what is translated into in Korean language. He want to rectify the misuse of the name of things. This is the prestep for writing a book about the name of things. Lee, Gahwan's work, 『Je ongheonswaerok』 is handed down in Dongyangmungo of Japan, and this book is related with 「Jabseul」. The subject material of 『Jeongheonswaerok』 is contained partially in Jabseul. These two works show Lee, Gahwan's spirit of inquiry and historical research. In addition, the problem and direction on the name of a thing could be found in these two works. He thought the academic attitude of seeking the original meaning of the name of a thing was needed and the study attitude of sophistry or following the same bad methods should be rejected, because the study of the name of a thing do not merely stay in the name of a thing but it could be the etiquette and the base which might determine the life of people. From this view point, the theme and direction proposed by Mr. Lee, Gahwan are considered not only in what attitude we should educate the Chinese character and writing but also the attitude we should keep in all areas of study. Except for this one, Jeongheonswaerok and Jabseul were written in about 1795 and these two books influenced 『Juklanmulmyunggo(竹欄物名考)』 of Jeong, yakyong and 『Mulmyungryuhae(物名類解)』 of Lee, hakgyu. Even though Lee, Gahwan passed away in 1801, his spirit was handed down to his nephew, Lee hakgyu, his junior, Jeong, yakyong, and established the basis for a different kind of Silhak(實學) in late 18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