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인지하는 방법은 개념화에 의지하고 있으며, 개념화는 인 지적 범주화의 과정이다. 본고는 광운의 物名 중에서 蟲名에 대한 고대인의 인지 범주적 특징을 살펴보았다. 또 물명이 하나의 글자에서 두 개의 글자로 합성되는 과 정 역시 두 개의 개념이 확장되고 변화하는 과정이라고 보았으며 이를 유형별로 나 누어 의미를 분석해 보았다. 합성어를 이루는 형태는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의미 A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 한자 A′가 합쳐져 A의 의미가 되는 경우, A와 B가 합쳐 서 A의 의미를 가지는 경우, A와 B가 합쳐서 B의 의미를 가지는 경우, A와는 다른 B와 C를 합쳐 A를 설명하는 경우이다. 이렇게 합성어가 되었을 때 그 구성한자는 해당의미가 변화하거나 유실되고, 다른 의미를 포용하여 의미항이 늘어나기도 한다. 이러한 합성자를 이루는 의미를 모두 연결망을 이어보면 어떤 한자가 서로 이어져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는지, 어느 동물이 서로 친근한지를 알 수 있는데 이런 경로는 복합적인 표현의 의미에 포함되며, 표현들 사이의 의미차이를 설명해 줄 수 도 있다. 우리는 스키마(schema)를 통해 이러한 복합적인 의미표현을 이해하고 인지 하며 추상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한자가 가지는 다의성, 동의자, 통가자 등의 이해를 도식화하여 이해하게 되면 한자를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한자를 유입하여 표기 문자로 사용하였지만, 중국과 달리 표기문자와 음성 언어를 달리하는 이원적 구도를 지니고 있었다. 조선시대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도 한자가 표기문자의 대표적 수단이었기 때문에, 지식인들 은 한자나 한자어로 된 물명을 어떠한 우리말로 대체시킬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조선후기 실학자들은 소중화의식의 확장․고증학의 발달 등의 영 향으로 철학적 담론이나 경세적 주제 외에도, 자학․물명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 다. 그 과정에 물명을 우리말로 풀이한 다양한 저서 『物譜』․『才物譜』 등이 출현 하였다. 그런데 과연 18세기 조선사회에서 통행되고 있던 한자나 한자어로 된 물명이 과연 우리말과 일치했던 것일까? 아울러 당시 통용되었던 물명류의 저작이 과연 철저한 고증을 거치고 오류를 시정한 다음 저술된 것일까? 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본고는 이점에 유의하여 李家煥(1742~1801, 자 廷藻, 호 貞軒․錦帶)을 주목 하고자 한다. 이가환은 茶山 丁若鏞(1762~1836)과 함께 18세기 조선의 대표적 실학자이다. 하지만 1801년 辛酉邪獄에 연루되어 죽음을 맞이했던 비운의 인물이 기도 하다. 그는 문학이나 천문․수학 방면에서 두각을 드러내면서 正祖(1752~ 1800)에게 깊은 신뢰를 받았다. 이 외에도 그는 한자교육과도 관련 있는 자학이나 물명에도 관심이 깊었다. 이에 필자는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이가환의 저작 『貞軒瑣錄』과 「雜說」을 중심으로, 李家煥의 物名에 관한 관심과 그 실천적 면모를 살펴 보고자 하였다. 『정헌쇄록』은 일본 동양문고 『東稗洛誦 續』에 전하고 있고, 「잡설」 은 국내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詩文艸』에 수록된 것으로 두 저작은 상호 관련 된 작품이다. 『貞軒瑣錄』과 「雜說」은 물명류의 저서 형태를 띤 것도 아니고 물명 을 우리말로 직접 풀이한 것도 아니다. 『정헌쇄록』은 이가환의 독서 잡기류로, 그 안에는 의복․음식․제도․가옥에 관한 기록 외에도 우리말과 물명의 어원을 고증 한 부분이 있다. 이에 반해 「잡설」은 한자나 한자어로 된 물명 등에 대한 정확한 재해석과 오류 시정이 핵심을 이룬다. 곧 이가환은 이 두 저작에서 물명의 원뜻은 무엇이고 우리말은 무엇인가를 철저히 고증하면서, 18세기 時俗에서 잘못 사용하 고 있는 오류를 지적하고 보완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 두 저작에는 학문 제영역 과 일상에서의 이가환의 철저한 탐구심과 고증적 학문태도가 돋보인다. 아울러 당 대 이루어지고 있는 物名에 관한 문제점과 방향도 읽을 수 있다. 이가환은 철저한 고증을 토대로 물명을 비롯하여 기타 영역에서도 原義를 철저 히 궁구하는 학적 자세가 필요하며, 절대 오류를 답습하거나 견강부회를 하는 식의 학습태도를 지양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물명이나 기타 한자어 연구는 단 순 물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을 영위하는 예절과 교양이면서 국가의 경영 곧 백성들의 목숨을 좌우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가환이 제기했던 이 같은 문제의식과 방향은 비단 物名 분야에 국한된 문제일 뿐 아니라, 학문 제반 영역에서 궁구해야할 자세로 생각된다. 이 외에도 『정헌쇄록』과 「잡설」 은 1795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丁若鏞의 『竹欄物名考』(19C)․李學逵의 『物名類解』(19C)․柳僖의 『物名攷』(1824年) 등의 저작에도 영향을 주었다. 곧 이가환은 1801년 삶을 마감했지만, 그의 정신과 학문은 그의 조카 이학규․후배 정약용 등에 이어져 조선후기 실학의 또 다른 지류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본지 제18권제2호(1979)에 제1보로 발표된 Evergestiinae와 Pyraustinae(새들명나방아과 및 들명나방아과) 목록에 이어 포충나방아과와 물명나방아과의 목록을 제2보로 발표한다. 포충나방아과는 일명 벼명나방 무리로 불리워지기도 하나 그들의 기주식물이 모두 벼(水稻)와 연관되는 것으로 오인될 우려가 크므로 필자는 전자를 따라 포충나방아과로 명명하였으며 종들의 이름도 이에 준하여 일부 개칭(改稱)하였다. 한국동물명집(2) 곤충편에는 나방아과에 19종이 수록되어 있으나 최근 필자등에 의하여 발표된 종들을 종합하여 본 목록에는 30종이 포함되었으며 물명나방아과에는 13종이 수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