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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05 구독 인증기관·개인회원 무료
        공주는 충청지역의 주요 역사도시로서 1930년대 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충청의 수부도시로서 기능하였다. 조 선시대 충청도의 감영도시이자 읍치로서 각종 관아시설들이 입지하였다. 지역 중심지로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상대적으 로 더 많은 훼손이 있었으며, 객사, 동헌 등의 읍치지 대부분이 이시기 훼손되었다. 공교롭게도 이시기에 제작된 자료들에 훼손 이전의 읍치 건축상황을 살필 수 있는 자료들이 남아 있어, 이를 근거로 고증복원해 보고자 한다.
        2.
        2021.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검여 유희강(1911-1976)은 북위 서풍으로 현대 한국서단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도한 서예가이다. 그는 전각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지만 그의 전각작품을 심도있게 고찰한 논고는 전무한 상태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검여의 유품 중에 전해지는 인장 실물과 그의 서화작품에서 확인되는 낙관의 인영을 총 정리하고 제작연대와 작 품성향을 분석해 다음과 같은 유의미한 내용을 도출해냈다. 첫째, 검여가 직접 새긴 인장은 33점 23세트로, 1952-1966년 사이에 집중되며, 1962년 검여서원 개설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본고에서는 검여 서화작품에서 20점 14세트의 인장을 새롭게 찾아내어 정리했다. 둘째, 전기는 등석여와 조지겸을 중심으로 청대 서가들의 전각을 두루 섭렵해 전각을 본격적으로 학습했으며, 후기는 오창석의 각풍에 주로 심취하면서도 금문과 한인의 자형 결구에 등 석여의 필세를 가미해 중후한 자신의 각풍을 구사하고 있다. 셋째, 검여의 전각돌은 대부분 한국 해남석을 사용했고, 전각기 법은 청대 서예가의 영향을 받아 충도법을 주로 사용했다. 특히 후기에는 오창석의 각풍을 구사하면서 한인과 육조 해서의 강인 한 필선을 전각에도 도입해 중후한 전각 기법을 구사했다. 넷째, 지인이 검여에게 새겨 준 인장은 21점 11세트로, 1964-1973년 사이에 집중된다. 또한 대부분 인장 실물이 현재까지도 보존되어 있어 1964년 이후 우수서와 좌수서 서화작품 에서 모두 확인된다. 다섯째, 검여의 작품에서 자신이 새긴 1-3번 인장과 여초가 새긴 24-26번 인장, 철농이 새긴 27번 인장이 검여의 우수기와 좌수기의 작품에서 낙관인으로 자주 사용됐고, 석봉이 새긴 32번 인장과 석불이 새긴 33번 인장이 두인으로 종종 사용됐다.
        7,800원
        3.
        2014.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trospect the establishment process of specification of modern factory-made traditional Korean roof-tile. Its another purpose is to analyze the specification of watong(瓦桶, a wooden molding frame for roof tile making) which is recorded in the literature of Joseon dynasty. The result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 First, the specification of modern factory-made Korean roof-tile that currently used was established in 1978. And it did not succeed old traditional specification. Second, in case of construction or repair of main building of palace, it was a principle to use Daewa(大瓦, the big size roof-tile). And Sangwa(常瓦, the ordinary size roof-tile) was used when needed. Also, Jungwa(中瓦, the middle size roof-tile) was used regardless of the size of group building. And Sowa(小瓦, the small size roof-tile) was used in house and wall of royal tomb. Third, it is needed to establish a specification of traditional handmade roof-tile based on the specification of watong through research of the litterateur. So, a standard draft for this was proposed. Finally, one can find the significance that this study has tried to find a specification of traditional roof-tile that can be applied to construction or repair of cultural heritage.
        4,000원
        4.
        2013.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여러 해석이 난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명칭과 위치 및 성격 등을 둘러싸고 여러 이설이 존재하고 있다. 민간에서는 척주동해비를 재앙을 막는 부적(符籍)처럼 간주하기도 하고 혹자는 축문(祝文)으로 보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본고에서는 비문(碑文)에 기술된 여러 해외의 이국 풍속에 대해 하 나하나 고증을 하면서 아울러 동해송의 문체를 분석해서 그 내용을 검증하고 이를 토대로 척주동해비의 성격을 규명하였다. 결론적으로 허목은 동해바다를 신비화하거나 주술적인 기원을 하려 고 한 것이 아니다. 그는 ‘동해송’(東海頌)이란 제목에서 보는 바와 같 이 동해바다의 아름다움과 덕을 찬탄하고자 한 시문을 써서 비석으로 세운 것이 동해척주비이다. 이 동해송은 조선시대 학자들 사이에서 존 경감을 가지고 읽혀지고 연구되었던 명문장으로 간주되었다. 여기에 더해 그의 독특한 서체(書體)와 이국적인 내용으로 인해서 척주동해비 가 재앙을 막아주는 신비한 힘을 가진 글로 신비화되었다고 본다. 허목(許穆, 1595∼1682)이 지은 척주동해비는 예로부터 난해하기로 유명해서 그 내용에 대해
        9,200원
        5.
        2011.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本論文探討了淸乾嘉時期崔述在疑古辯僞, 考信求是的學術談論中所涉及的若干成就, 主要以崔述的代表著作≪考信錄≫里所載的考證例話爲材, 評釋了其文化談論的文章內容風格及精神所在。崔述的學術本位重在考實, 要考問周詳, 考而后信, 又要考古必確必明, 析理必精必湛, 而且他在尊經崇聖的主體精神的基礎之下, 强調君子務實, 注重人材, 終極的指向點爲善政牧民, 此可以說是與當時的考證史家, 爲學術而求學的思想固陋的諸儒大有區別之處。從上所述, 我們可以看出崔述的考證例話正反映他的批判的實學精神, 另一種角度來說, 崔述的考證談論能够具備了多重思維的性格, 集中活用了與生活密接關係的各樣各色的知識, 就事論事, 以史論史, 敢脫軌疑古考證有所難免的片面枯萎的治經方式, 慨歎盲目追崇的時勢弊端, 始終堅持公正分析的態度, 來實現了先考字義, 次通文理的治學方法之妙。崔述的爲學, 決不離乾嘉學派的一般學術傾向, 却他的文章講述注重擧例而證實, 每項點破自己主觀見解, 又有條理, 首尾貫衡, 更有親密敢, 容易形成共感帶, 喚起主題樞心, 多含經世致用, 治法治人之述。還有, 崔述的考證例話多用散而不散, 雜而不雜的文章結構和修辭立言, 可以說是難能可貴的文章作法, 必謂淸代學者之文中數一數二的成就。
        9,000원
        6.
        2010.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8,700원
        7.
        2008.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최술은 이름 없는 선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의 저술 《수사고신록》은 공자 사적 고증의 압권이다. 정확한 고증을 통해 믿을 수 있는 것만 믿겠다는 최술의 집념과 학구적인 태도는 그를 고증학의 대가로 자리매김한 원동력이었으며, 《고신록》과 그 일부인 《수사고신록》은 先秦史와 공자 사적에 얽힌 난제들을 풀어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최술은 공자의 사적을 변증하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전적의 신뢰도에 천착했다. 그리하여 《사기․공자세가》와 《공자가어》가 공자의 사적을 왜곡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를 중심으로 고증을 진행했기 때문에 汗牛充棟의 전적을 枚擧하지 않고서도 綱擧目張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최술은 《논어》의 編定에 결정적인 역할은 한 張禹의 오류를 지적함으로써 《논어》에도 純雜이 뒤섞일 수밖에 없음을 밝혔으며, 아울러 공자가 纂輯했다고 일컬어지는 《尙書》․《周易》의 일부분 및 《孝經》과 刪詩說 등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辨證을 진행했다. 《수사고신록》은 僞書의 牽强附會로 왜곡되고 날조된 성인 공자의 진면목을 복원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으며, 有機的인 體例를 활용하여 고증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이제 그런 최술의 저술을 바탕으로 중국 고대사와 공자 사적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와 검토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다.
        6,900원
        8.
        2008.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本題以崔述的《考信錄》諸書爲文獻資料來考察有關音樂考證部分, 主 要觀點在其中有無文化談論的要素和特色. 崔述的有關樂論的考證, 多有文 化談論的色彩, 可分爲本體論的談論和功用論的談論兩部分. 崔述的考證指 向點就根據儒家的音樂觀, 但是他太注重禮樂的政治社會文化的機能, 甚至 於連神話領域的樂論也連接到儒家思想, 一面看起來, 理論上本無問題, 而 筆者個人認爲難面有臆測之欠. 雖然如此, 在音樂的本質性性格和形成過程 上的段階的進展等問題上, 崔述非常努力解釋歷代學者們不能解決的問題以 及曲解的地方. 功用論的談論上亦是寓有創見, 但一方强調音樂的社會功用 性, 有點疏忽音樂自體的純粹性, 爲人感情的自然發露等原形質的槪念, 反 而表面上强調儀式化的音樂到底支配士大夫和一般人的意識, 崔述就鼓吹見 禮知政、聞樂知德, 審樂知政、觀風審音的功用性由此成爲中國傳統音樂文 化思想的主要思想基礎. 總而言之, 崔述不陷於疑古史學的朔漠無味的考證方法, 自己堅持着純 粹的科學的思維和苦心實踐, 平素强烈希望能闡明孔子所達道的正經美學, 終於他的《考信錄》可以說是其精神所歸, 代表的他的寶貴的知的所産. 雖 然崔述自己缺乏傳統音樂上的專門知識和經驗, 但是他一直不離傳統禮樂思 想和孔子所說的「游於藝」的文藝精神, 「聞樂知德」的社會功用性, 明其理, 達其致, 大膽糾正俗世學人的曲經誤謬, 欲振作儒家學風. 筆者發見在《考信錄》當中有很多文化談論的考證事例, 崔述能夠應用 字句解釋, 文獻比較, 論理辨證, 文化批評等多樣多彩的硏究方法來創造出 一面科學的, 一面人文的文化考證. 崔述的文化談論的考證事例, 關鍵就在 它可以說是具體表明他的疑古釋古參古的學術思想, 成其客觀和主觀的和諧, 實踐尙古信古復古的學問理想. 傳統中國文化上音樂就是最有代表性的文化遺産, 中國的色彩和民族性 的反映度已達其頂點, 在21世紀西歐音樂澎湃的文化環境下依然維持着對抗 的氣象. 換句話說, 誰也不能否認中國的傳統音樂是中國文化的審美基礎, 思想的核心. 活在18世紀的崔述已經認識度中國傳統音樂的存在價値, 努力 成章, 幸虧到今天中國傳統音樂決不息其氣運, 在中國人的意識形態和生活 空間上繼續發揚其順其自然的美德使命.
        6,900원
        10.
        201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연구는 근대 일본의 대표적 관찬사료인 『조선국 교제 시말 내탐서』, 『죽도고증』, 『태정관 지령』에 나타난 울릉도·독도 인식에 관한 연구이다. 19세기 후반 일본정부에서 발행한 이 사료들은 울릉도⋅독도가 역사적⋅지리적으로 한국의 영토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17세기말 안용복사건에 의해 촉발된 울릉도쟁계(죽도일건)를 통해 확인된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영토’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는 사료들이다. 먼저 『조선국 교제 시말 내탐서』13항 ‘죽도와 송도가 조선의 부속이 된 경위’에 대한 검토를 통해 일본 외무성이 “울릉도(죽도)는 물론이고 독도(송도)에 관해서도 기록된 서류가 없다”고 인정함으로써, 울 릉도와 독도가 하나의 세트로 인식되었으며, 역사적·지리적으로도 조선의 영토였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죽도고증』에서 기타자와 마사나리는 울릉도에 대해서는 한국의 영유권을 인정하면서 독도에 대해서는 일본의 영유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1860년대 이후로 당시 일본이 울릉도와 독도의 명칭과 지리적 인식에 대해 매우 혼란스러웠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당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일본의 역사적⋅지리적 인식이 매우 부족했 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태정관 지령』에 대한 검토에서는 “죽도 외일도는 본방 과 관계없음”을 확언한 태정관지령과 첨부지도 ‘기죽도약도’를 통해 독도가 역사적·지리적 으로 한국의 고유한 영토임을 확인할 수 있다. 기죽도약도에서 표기된 조선동해-울릉도-독도-오키섬 간의 지리적 거리도 현재의 거리와 수치적으로 거의 일치하고 있으므로 ‘외일도 =송도(독도)’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결국 근대 일본의 대표적 관찬사료인 『조선 국 교제 시말 내탐서』, 『죽도고증』, 『태정관 지령』을 검토해 봐도 울릉도⋅독도가 역사적 ⋅지리적으로 한국 영토임을 확인할 수 있으며, 17세기 중반 이래 독도에 대해 실효적 지배를 해왔다는 일본의 ‘고유영토론’은 조작된, 허구적 주장이라는 사실이 한층 더 명백해 졌다.
        11.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19세기 중엽에 일본 외무성에서 편찬된 「죽도고증」이 지금의 독도 영유권 관련 이슈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흔히 「죽도고증」이 독도 영유권 관련 자료인양 인식되고 있으나, 이 자료는 어디까지이 고 울릉도 영유권 관련 자료이다. 19세기 중엽 당시 일본 외무성에서 울릉도 영유권에 대해 논의된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일본 에도 시대 이래의 문서들에서 울릉도는 항상 독도와 함께 취급되어 왔다. 「죽 도고증」은 이러한 문서들을 저본으로 편찬된 것이다. 따라서 이 자료는 에도 시대 독도 관련 기록에 대한 내비게이션의 역할도 한다. 「죽도고증」은 또 다른 의미에서 지금의 일본의 독도 영유권 논리와 관계가 있다. 「죽도 고증」에 기술되어 있는 19세기 당시의 외무성에서의 울릉도 영유권 관련 논의에서 독도는 제외되어 있다. 그러나 이 때 기록국장 와타나베 히로모토가 울릉도가 일본 섬일 수도 있다 는 주장을 하였는데 이 주장과 함께 그가 자신의 논리를 펼친 방법 -섬의 명칭 혼란-, 근거 자료-오키의 마쓰시마-가 후에 1950년대 일본 정부의 독도 영유권 논리와 주장의 토대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