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1810년 유배지에서 지은 李學逵의 「城市全圖詩」가 현전하는 다른 8종 의 「성시전도시」와는 그 성격을 크게 달리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 장편시의 창 작 배경과 특성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이학규는 규장각에 출입하며 「성시전도」와 관련된 전고와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또한 화가 김홍도와 교유하고 명청의 화론서에 식견이 풍부하였으므로, 「성시전도시」 창작이 용이하게 이뤄질 수 있었 다. 특히 평소 친분이 있었던 박제가의 「성시전도시」를 보게 된 것이 이 장편시 창작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판단된다. 이학규의 「성시전도시」는 크게 보아 전반부의 서울 도성의 사실적 묘사와 후반 부의 자기고백적 悲歌로 구분된다. 그는 이 시의 후반부에서 현실을 상상으로 이 상화시켜 이해하거나 과거의 고향을 회상함으로써, 불우한 문인의 정신적 고뇌와 우수의 정감을 망상과 상상의 방식으로 해소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학규는 관각문장의 성향이 굳어져 그 표현의 길이 극히 제한된 「성시전도시」 양식을 차용하여, 거기에 자기고백적 서정성을 담아내는 새로운 성취를 이루었다. 이 점에서 이학규의 「성시전도시」는 박제가․신택권의 시와 동일한 층위에 놓일 수 없는 보다 고유한 영역을 확보했다고 평가된다.
The poetry for Seongsijeondo was written by the civil ministers working at Gyujanggak in 1792, according to the command of King Jeongjo. At that time, Lee Hak-kyu was involved in the editing of the Gyujangjeonwun(奎章全韻) while access to the Gyujanggak. In addition to his sentence Jeongjo been recognized name in the world widely announced. Because of these facts, Lee Hak-kyu likely also saw the painting of Seongsijeondo. He was well versed on the picture. Actually he has commented on a picture of someone and read the books of painting related. Lee Hak-kyu's poetry for Seongsijeondo was creative in exile. This is another creative writers of poetry are different from those made in Hanyang(Seoul). Drawn in the figure of the painting of Seongsijeondo, acted as a mediator reminds him home. He expressed the appearance and customs of Hanyang(Seoul) in the late eighteenth century. And his exile customers as screening was projected. Because the painting of Seongsijeondo was acting as a driver to look reminds him of his home and family lived in exile previous. As in the case of Lee Hak-kyu, the poetry for Seongsijeondo actively exposed his inner case is very rare. This is the unique characteristics that distinguish it from other poetry for Seongsijeon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