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濟州島)는 바다로 고립된 절해고도(絶海孤島)로서 고 려 후기부터 조선 말기까지 수백 명의 사람들이 유형(流刑)에 처해졌던 유배지였다. 제주도는 원(元)에 의해 점령된 후 100여 년 동안 이민족의 유배지였던 역사적 사실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당론과 정치 적으로 최고형을 받은 유형수들을 최고 멀리 떨어져 있는 제주 도를 유배지로 선택했다. 유배되어온 사람들은 정치인, 왕족, 문인, 관리, 학자를 비롯하여 경중(輕重)의 범죄자들을 정치적 으로 격리하기 위한 최적지의 유배지였다. 주로 외부와의 차단 형벌인 집 주위 울타리에 가시를 둘러쳐 그 안에 살게 하는 위 리안치(圍籬安置)와 절해고도에 살게 하는 절도안치(絶島安置) 의 형벌에 처해졌는데 제주도 유배는 외부와 단절된 절도안치 에 해당하는 최고의 무거운 형벌이었다. 본 연구에서는 조선시대에 기사환국(己巳換局)과 여러 차례 어려운 일들을 걸쳐간 숙종시대 문인 북헌(北軒) 김춘택(金春 澤)의 제주 유배지에서의 후학 양성, 그리고 유배지에 남긴 흔 적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북헌 김춘택은 숙종의 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조카이자 구 운몽(九雲夢),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지은 김만중(金萬重)의 종손자이다. 어려서부터 김만중에게서 수학하였고 재질이 탁월 하여 김수항(金壽恒)의 탄복을 받기도 하였다. 정쟁 때마다 항 상 서인 · 노론의 중심가문에 속해 있어 힘든 고초를 겪었다. 제주도 유배는 1706(숙종32) 9월에 제주로 유배되어 1710년 (숙종36) 임피(臨陂) 소안역(蘇安驛)으로 이배되면서 제주를 떠 났다. 제주에 유배되는 동안 부친 김진구(金鎭龜)가 제주유배 시 거주했던 곳에서 거주하며 부친이 가르쳤던 제주 유생을 가 르쳐 과거에 급제하는 성과를 낳았다. 학식과 지식이 불모지였던 제주에서 후학양성 측면에서 재조명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 고 판단된다. 그간 많은 사람이 북헌(北軒)에 대해 논하였으나 제한적이나마 제주에 남긴 북헌의 흔적을 고찰해보고자 하며 후학들의 남긴 문학적 자료도 연구가 필요할 것이나 워낙 파편 적이고 제한된 고증 자료로 인해 어려움이 많았다.
조선 시대의 유배는 주로 정치범에게 적용되었던 형벌이었다. 정치 상황이나 죄인의 신분 혹은 죄의 경중에 따라 유배지도 결정되었다. 특히 조선 중기에 들어 당쟁이 치열해지면서 유배는 대부분 섬으로 가게 되었다. 유배는 현대와 달리 비리에 의한 것보다는 당쟁의 결과였으며 정치적인 속성을 띄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본 고는 이를 위하여 유배가 주는 우리의 문화유산을 긍정적으로 보는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이를 조선 후기의 우봉 조희룡의 심미경계를 통하여 고찰하였다. 그는 여항문인화가로 임자도에서 19개월간의 유배 생활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육체적 정신적 시련과 한계상황을 극복하여 자신의 예술세계를 심화시켰다. 그는 자신의 처소인 만구음관 주변에 자생하는 대숲의 자연을 통하여 묵죽의 문인화에 천착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의 묵죽 문인화는 심미경계를 심화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그의 묵죽의 심미경계는 독표성령(獨標性靈)의 심원미학(心源美 學)⋅자출기저(自出機杼)의 심장미학(心匠美學)⋅자성별구(自成別區)의 심득미학(心得美學)에 나아갔다. 심원의 미학은 조희룡의 독자적인 성령론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심장미학(心匠美學)은 스스로 우러나와 이루어진 자출기저(自出 機杼)이다. 또한, 심득의 미학은 스스로 자신의 개성을 바탕으로 한 자성별구 (自成別區)였다. 이와 같이 조희룡 묵죽의 심미경계는 심화 경지에 나아가게 되었다. 이와 같이 그의 유배는 역으로 한 예술가에게 자신의 예술에 천착할 수 있는 기회도 주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 문인예술은 유배를 통하여 그 깊이의 세계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역으로 이러한 측면 에서 살펴보면 유배문화는 우리 문화예술에서 하나의 선물이었다.
중국의 유상곡수거(流觴曲水渠)는 대부분이 암석에 조영됨으로서 인공적인 색채가 매우 강하였으며 왕희지의 난정 이후 곡수 유배거는 정자 내부로 조성하는 경향이 심화되었다. 그러나 유상곡수를 주제나 모티브로 한 다수의 그림에서 왕희지의 난정기(蘭亭記)에서 보이는 배경 산악의 숭고미와 자연성 높은 계류와 수림을 배경으로 ‘일상일영(一觴一詠)’하는 선비들의 행태를 담는 비기하학적유상곡수 형태를 기본적 도상(icon)이자 텍스트로 하고 있음이 발견된다. 중국 소흥의 ‘난정’ 유상곡수연 유거는 그 후 복원된시설이긴 하지만 유상곡수 문화의 일대 전환점이자 획을 그은 정원시설이자 풍류문화의 산실이었다 할 만하다. 곡수연(曲水宴)관련 풍류문화는 국내에서 삼국시대로부터 고려, 조선, 근세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전승되는 양상을 보여주는데 곡수거의 조영형태는 중국으로 부터의 도입 초기에는 정형적인 인공형태를 보였으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점차로 한국의 풍토환경과 정서에 부합되는자연스러운 곡수로 형태로 조영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물의 도입이 용이한 자연 계류수 또는 암반과 관련시켜 돌을가공하여 수로를 만들었다. 즉 암반 위에 타원형의 수로를 음각(陰刻)하거나 웅덩이 형태로 소용돌이를 만들어 곡수연을 즐길수 있도록 하거나 자연 지반에 음양석 형태의 자연석이나 경석을 이용하여 굴곡 수로를 만드는 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또한 현대에 들어서도 유상곡수의 문화를 살리기 위한 조경시설과 풍류문화가 면면히 이어짐은 매우 반가운 현상으로‘유상곡수’가 전통조경 및 휴양레크레이션 문화를 담는 문화콘텐츠이자 문화로 정착되기를 기대한다.
간정일록은 해기옹 김령이 단성항쟁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1862년 6월 4일부터 1863년 12월 30일까지 전라도 임자도에 1년간 유배되었 다가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지낼 때까지의 일상을 기록한 유배일 기이다. 한 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신이 겪은 일들을 기록하기 시작 한 며칠을 제외하고, 날짜에 따라 매일의 일상을 행간의 구분 없이 기록 하였다. ‘간정’이란 『주역』에 나오는 말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마음을 바르게 가진다면 허물이 없어진다[간정무구]’는 의미이다. 간정일록에는 130여 편의 한시가 실려 있다. 그 시들은 벗들과 술자리에서 수창할 때, 마음속의 회포를 풀려고 할 때, 주위의 요구가 있을 때, 잠을 이루지 못할 때 등 다양한 상황에서 지어진 것들이다. 이 시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김령의 인간적인 면모들이 담겨 있다. 김령은 단성항쟁을 주도하며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문집이 없음으로 인해 그의 면모를 알 길이 없었다. 간정일록의 한시에는 온유돈후한 가장의 모습, 현실의 부조리에 대 해 개탄하는 유자(유자)의 모습, 고뇌를 타개해 나가려는 지식인의 모습 등 알려지지 않았던 김령의 인간적인 면모들이 나타나고 있다. 김령은 강자에겐 강직하며, 약자에겐 온유한 인물로 약자 편에 서서 현실적인 부조리를 개선하고자 했다. 간정일록에 수록된 한시에 나 타난 이러한 김령의 인간적 면모들을 보면 그가 단성항쟁을 주도한 그 이면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