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panese Policy on Dokdo around San Francisco Peace Treaty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외무성은 SCAPIN 677에 의해 일본의 영역에서 분리된 일본 주변 섬들을 되찾기 위해 이들에 관한 영토조서 4권을 1947년까지 작성해 미국에 제출하였다. 이 중에 독도(다케시마)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일본정부는 영토조서 제출 후 독도에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독도는 류큐 등에 비해 중요도가 각별히 낮음으로 거의 무시되었다.
1951년에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독도는 규정되지 않았다. 이에 위기감을 가진 시마네현의 호소를 계기로 외무성은 독도 연구를 시작하였다. 또한 한국이 1952년에 평화선을 선포하고 독도를 그 안에 넣자 외무성은 독도 영유권의 공고화에 나섰다. 그 하나가 미·일 합동위원회에서 독도를 주일 미군의 폭격 연습장에 지정하는 것이었다. 이 지정에 인해 한국 어민들이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1953년 5월에 지정이 해제되었다.
해제를 계기로 독도로 항행한 시마네마루가 한국인의 어로를 발견하자 일본정부는 「다케시마 대책 요강」을 결정하였다. 이 목적은 독도를 경찰력으로 탈취하는 것이었다. 이런 횡포에 한국 측은 분노해 일본 순시선에 총격을 가했는데, 오히려 외무성은 한국정부에 사건을 항의하고 영유권 시비를 걸었다. 그러나 외무성은 「한국정부견해1」을 받자 영유권 논쟁만 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고 국제사법재판소(ICJ)로 제소하는 준비를 시작하였다.
다음해 다시 일본 순시선이 총격을 당하자 일본정부는 ICJ 제소를 한국정부에 제안하였다. 물론 한국정부는 이를 거부해 재판은 성립되지 않았다. 일본정부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하려고 여러 방도를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나머지 방도는 한일회담에서 쟁점화 하는 것이었다.
Right after the Second World War, Japan MOFA submitted four monographs about Japan territory to US in 1947 to recover the separated islands from territory around Japan by SCAPIN 677. Dokdo(Takeshima) was included among these islands, but Japan government was not cared Dokdo so much after the submission because Dokdo was not so important than Ryukyu comparatively and ignored.
Dokdo was not listed in San Fransico Peace Treaty in 1951. Facing serious crisis of Shimaneken and petition, Japan MOFA started study on Dokdo. Also the declaration of the Peace Line(Lee Line) in 1952 including Dokdo in Korean boundary, Japan MOFA started to insist a claim for Dokdo. One of the decision for the policy was appointing Dokdo as an air-force maneuvers area for US armed forces residing in Japan by Japan·US Committee. As a result of the decision, Korean fishers were bombarded and the decision was released in May 1953.
When Shimane Maru sailed to Dokdo after the release, Shimane Maru found Korean fishing work and Japan government prepared ‘General Takeshima Measure’. The purpose of this measure was to seizure the island by police power. Korean police raged at invasion of Japanese patrol boat and shot it, but Japan MOFA protested the event to Korean government insisting territory sovereignty. Receiving refutation of Korean Government, Japan started to prepare ICJ suit to resolve the dispute on territory 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