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는 왕족 출신의 신라 최고 귀족으로서 신라의 대외팽창과 국가체제 정비에 앞장 선 국가의 동량이었다. 그가 살았던 6세기 전반은 신라가 크게 융성하고 뻗어가는 시기였다. 그는 국사 편찬을 건의함으로써 내치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획을 그었고, 동해안 진출과 남해안의 가야 진출을 주도함으로써, 동남해 연안항로에 대한 주도권 확립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는 이후 신라의 국가 발전에 절대적 원동력이 되었다.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은 동해안 패권을 확립한 것을 의미하고, 금관국의 복속은 김유신 가문을 영입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신라의 삼국통 일이 이사부와 김유신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이것이 이사부가 성취한 해양진출의 큰 의의이다. 장보고는 섬 출신의 일개 평민 신분으로 이사부와는 신분적으로 대조적이다. 그 가 살았던 9세기 전반은 국가가 주도하는 공무역보다는 개인 능력자가 주도하는 사무역이 발전하는 시기였다. 바로 이 시기에 장보고는 당으로 건너가 군인으로 출세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해양무역의 최고 거상으로 성장하였다. 828년에는 신라에 돌아와서 흥덕왕의 지지를 얻어내 완도에 청해진을 건설하여 동아시아 해상 무역을 주도하는 기지로 활용했다. 그는 단순한 무역업에 그치지 않고 서남해지역에 대규모 청자생산단지를 건설하여 신라를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자기를 생산하는 나라가 되게 했으며, 한 중 일의 바닷길을 잇는 이른바 ‘장보고항로’를 활성화시켰다. 청자생산단지는 이후 고려청자로 이어져 전성기에 이르렀고, ‘장보고항로’는 고려시대에도 핵심 항로로 지속 발전해 갔다. 결국 이사부는 ‘원조 해양진출의 영웅’, 장보고는 ‘본격 해양진출의 영웅’이라 평가할 수 있겠다.
이사부는 왕족 출신의 진골귀족으로, 나가서는 명장으로, 들어와서는 명재상으로 6세기 신라의 비약적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그는 동해안 진출을 주도하고 가야 병탄을 완수한 명장이었으며, 병부령으로, 上臣으로 군정과 국정을 총괄하고 국사 편찬에도 힘을 쏟았던 명재상이었던 것이다. 동해안 진출의 업적은 그의 이력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 북방 문물의 유입로이자 고구려와 토착 ‘말갈’(濊) 세력의 침 입로이기도 했던 동해안은 신라에겐 양날의 칼이었다. 신라가 일찍부터 동해안 진출을 시도했지만 동해안의 정세는 늘상 불 안정했다. 그런 동해안에 대한 안정적인 편제의 기틀을 마련한 자가 바로 이사부였다. 실직주 군주와 하슬라주 군주를 연임하면서 동해안에 대한 군사적 진출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고, 우산국 정벌을 통해서 동해 제해권 장악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 육상과 해상에서 동해안을 장악함으로써 동해안의 불안정성을 크게 해소했던 것이다. 그의 우산국 정벌 과정은 드라마틱하기까지 하다. 목사자를 앞세운 그의 우산국 정벌 이야기는 이후 인구에 회자되었고 저 명한 학인들의 저서에 오르내렸다. 민속놀이 狻猊의 소재로 이용되었고, 막강 해상세력 우산국 우해왕 설화의 핵심 소재가 되었다. 대중가요 ‘독도는 우리 땅’을 통해 이사부의 이야기는 오늘도 노래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