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1959년 일본의 재일조선인 북한송환(북송) 발표 직후인 2월 부터 6월까지 한일 양국의 국회에서는 재일조선인 북송에 대해 어떻게 논의를 전개하였는지 분석하였다. 즉, 본 연구의 질문은 ‘1959년 초반 한국 국회와 일본 국회는 재일조선인 북송 문제에 대해 어떠한 논의를 했는가?’이다. 이에 답하기 위해 본 연구는 한국 국회와 일본 국회의 1959년 회의록을 분석했고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우선 한국의 국회는 북한을 주권국가가 아니라고 보며 일본의 재일조선인 북송 계획에 반대 하는 논의를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국회 내의 의견 차이로 한 국 국회가 재일조선인 북송 문제 해결을 위한 구체적이고 본격적인 논의 를 진행하는 것은 어려웠다. 반면 일본의 국회는 한국 정부와의 관계 악 화를 우려해 재일조선인 북송 문제를 한일회담과 구분하여 처리하는 방 안을 논의했다. 또한, 일본 국회는 일본 정부가 북송 문제에 직접 관여하 지 않도록 국제적십자위원회가 재일조선인 북송 문제를 주도하여 해결해 야 한다는 방침을 세우며, 동시에 북송 실행을 위해 북한적십자사와의 회담에서 원만한 해결을 위해 논의를 확장하였다. 그러므로 재일조선인 북송 문제에 대한 1959년 2월부터 6월까지의 한국과 일본의 양국 국회 의 논의를 비교하면, 일본 국회의 논의가 한국의 국회 논의보다 구체적 이고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 1959년 12월 재일조선인 의 북송은 결국 실행되었다.
본 논문은 냉전기 1959년부터 재일조선인 북한송환 후의 인권 문제와 관련하여 비정부 행위자에 초점을 맞추어 NGO ‘모두 모이자’의 설립자인 가와사키 대표의 활동을 분석하였다. 본 연구는 ‘모두 모이자’ 설립 후 2015년부터 현재까지의 가와사키 대표의 활동을 신문 기사 등의 1차 자 료를 통해 냉전기 재일조선인 북한송환 이후의 인권 문제에 대한 구체적 인 분석을 하여 기존연구의 공백을 보완하였다. 본 논문은 다음의 두 가 지 점을 제시한다. 첫째, 1959년에 시작되었던 재일조선인 북송문제는 끝난 것이 아니며, 여전히 우리가 계속 풀어야만 하는 역사적 문제이다. 둘째, 재일조선인 북송사업 이후 관련자들의 인권 증진을 위하여 ‘모두 모이자’는 국가 행위자가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에서 큰 활약을 했으며 계속하여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모두 모이자’의 가와사키 대표 의 재일조선인 북한송환 피해자들의 인권 증진을 위한 여러 활동은 한국 과 일본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재일조선인 북한송환의 피해를 알리는 계 기가 되었다.
본 논문은 민정 이양 후 1964년 3월부터 계엄령 직전인 5월까지 한국 국내의 한일회담 반대 운동과 관련하여 한국 국회에서 어떠한 논의가 진 행되었는지 고찰한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국회회의록, 신문기사 등의 1차 자료를 활용하여 분석한다. 본 논문은 핵심질문인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운동과 관련하여 한국 국회 논의는 어떻게 진행되었는가?’에 대해 다음 두 가지의 특징으로 답한다. 첫째, 3-4월 국회에서는 여당과 야당 모두 한일회담 반대 운동을 우려하여 반대시위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으 며 한일회담과 관련된 논의를 하였다. 둘째, 5월 국회의 논의는 한일회 담 반대 운동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대처와 시위 주체의 위법성을 중심 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여당은 5월 20일의 한일회담 반대 운동을 공산주 의와 연결하여 보았고 일부 정치인들이 개입되었다고 판단하였다. 반면, 야당은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여전히 평화적 시위라 여겨 박정희 정권의 대응이 과격하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1964년 3월의 한일회담 반대 운동 확산 후 계엄령 전까지 한국 국회는 한국 국내의 불안정 상황을 해결하 기 위해 여당과 야당이 여러 논의를 시도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