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신라 말기 문학 서예 역사 철학 등에서 매우 뛰어난 인물로 특히 우리나라 서예사(書藝史)에 큰 족적(足跡)을 남긴 거목이다. 최치원에 대한 시 문학과 사 상. 정치. 철학. 종교 등에 대해 많은 연구논문이 계속 나오고 있다. 그는 서예의 대표작으로 <진감선사비(眞鑑禪師碑)>와 『숭 복사비(崇福寺碑)』를 남겼고 시문집으로 『계원필경집(桂苑筆 耕集)』과 『고운집(孤雲集)』등 많은 문헌을 남겼다. 이처럼 그는 인문학적으로 깊고 넓은 학풍과 문학적인 정감을 갖춘 문 장가이며 사상가이며 또한 서예가이다. 본 고에서 논하는 <진감선사비>는 885년에서 887년에 세워 졌다. 본 비문은 학문적 자료 가치가 매우 높으며, 특히 한국의 불교사는 물론 한문학사. 서예사. 사상사에 연구 대상이 되었 다. 더욱 <진감선사비>의 독창적인 전액(篆額)은 수준 높은 경 지를 보여준다. 이는 당(唐)나라에 머물렀던 17년 동안 모든 서 예를 섭렵한 결정체라고 할 것이다. 아울러 <진감선사비> 전 액에서 <설문해자>와 <한간>, <삼체석경>의 조형을 벗어나 오늘날 서예의 한 장르를 창조했다. 이미 1200여년전에 외형적 문자 조형에 깊은 조예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독특한 최 치원 체라고 할 수 있는 혁신적인 서풍을 탄생시킨 것에 큰 의 의를 둔다 그러므로 본 고에서는 서예가로서의 최치원의 <진감선사비> 를 분석하여 서예미를 논하였다.
최치원의 삶과 <진감선사비>의 서예연구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최치원은 12세 어린 나이에 중국으로 유학을 가서 「討黃巢檄」문으 로 文名을 떨쳐 紫錦魚袋를 하사받고 唐書․藝文志에 수록될 정도 로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894년 귀국 후 時務策 10조를 올려 阿湌 까지 올라갔으나 국세가 기울자 898년에 스스로 불우함을 한탄하고 벼슬에 뜻을 두지 않기로 맹세하며 방랑의 길을 떠났다. 이를 통하여 그가 중국에서 닦은 학문과 재주를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속세에 묻힌 그의 비극적 삶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진감선사비>의 전액과 비문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독창 적이고 자유분방한 서체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는 <진감선사비> 를 감상하는 시각이다. 종래에는 이것이 누구의 서체에 가깝고 누구 의 서풍과 닮았다고 하는 것이 감상의 주된 초점이었다. 그러나 전액 과 비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무엇과 닮았다는 것은 객관성 확보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그것과는 달리 천편일률적으로 판에 박히지 않고 활달하며 자유로운 필치를 나타내고 있다. <진감선사비>가 누구의 서 체와 흡사하다는 것은 시대적 제약이나 그는 결코 개성까지 말살하지 는 않았다. 만약 거꾸로 <진감선사비>를 당나라 서풍과 비교한다면, 아마 당시 유행하였던 모든 서풍이 여기에 융해되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진감선사비>는 당나라의 모든 서풍을 융해시켜 자신의 성정 을 나타낸 새로운 창작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글의 핵심이고, 앞으로 한국서단이 주체성을 가지고 중국서예를 어떻게 수 용할 것인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