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詩題: <和國信張宗益少卿過潭州朝拜信武殿> 潭州: 文淵閣本과 中華書局本의 《蘇魏公文集》에서의 표기는 모두 “潭州”이지만, 이는 “澶州”의 오기이다. 潭州는 湖南省의 長沙를 가리키는데, 이 潭州는 北宋 元豊3년 이전의 奉使路線과는 동떨어진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澶州에는 眞宗의 神御를 모신 信武殿이 있었고, 蘇頌에 앞서 出使했던 劉敞과 沈遘가 澶州에서 澶淵之役을 회상하며 각각 〈朝謁信武殿二首〉와 〈信武殿〉을 지었다는 점은 필자의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한다. 張宗益: 蘇頌의 〈前使遼詩〉와 韓琦․文同 등의 시로부터 그가 熙寧 원년을 전후하여 澶州․河間府 (및 相州) 등지에서 봉직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北宋 河北路에서 다년간 근무한 경력이 있으며, 胡宿은 그를 河北東路 방어의 전문가로 인정하고 있다.
② 제1․2구: “夷裔陵邊久, 文明運算高.” 北宋 외교정책의 고명함을 찬양한 것이다. 필자는 기존의 해설을 따른다.
③ 제3․4구: “三冬馳日御, 一夜隕星旄.” 眞宗의 澶州 親臨과 遼나라 장수의 사망 사실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각각 沈遘의 〈信武殿〉 및 王安石의 五古와 七古의 〈澶州〉 두 수의 시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④ 제5․6구: “從此通戎賂, 于今襲戰袍.” 澶淵之盟의 결과 遼나라와 교역이 이루어지고 전쟁이 종식되었음을 읊고 있다. 필자는 기존의 해설을 따른다.
⑤ 제7․8구: “威靈瞻廟像, 列侍冩賢豪.” 信武殿에 안치된 眞宗과 신하들의 초상화를 보고 그 모습을 찬양한 것이다. 劉敞이 〈朝謁信武殿二首〉에서 각각 眞宗과 寇準의 초상을 찬양한 점은 필자의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한다.
⑥ 제9․10구: “民獲耕桑利, 時無斥堠勞.” 평화의 결과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지고, 요나라에서 침공해 올 염려가 없어졌다는 점을 묘사했다. 필자는 기존의 해설을 따른다.
⑦ 제11․12구: “金繒比干櫓, 未損一牛毛.” 遼나라에 보내는 歲幣는 무기의 비용보다 훨씬 작다는 점을 강조하며 遼나라와의 평화관계를 찬양한 것이다. 필자의 의견은 기존의 해설과 같다. 단 “干櫓”를 中華書局本에서는 “千櫓”라 표기했고, 〈蘇頌使遼詩注釋〉에서는 “櫓”를 “望樓”로 풀이했지만, 그럴 경우 “櫓”는 제10구의 “斥堠”와 의미상 중복된다. 文淵閣本의 표기인 “干櫓”가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