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益成은 1526년에 태어나 1584년 肅川都護府使로 재직 중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 인물이다. 그의 문집인 옥동집은 전란으로 잃어버리고 남은 詩文 들을 모은 것으로 그 분량이 매우 적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여 본고는 특히 관직 생활과 연관된 시를 중심으로, 그 삶의 과정들을 살펴본 것이다. 먼저 승문원과 사섬시에 근무할 때 지은 것으로 보이는 「禁中題立春」과 「題 司贍寺契軸贈同僚」에서는 관직 생활의 희망, 임금을 송축하는 마음이 작품의 주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洪原縣樓贈別朴公鳴渭」 「次端川上房韻」에서는 향수와 함께 약간 울적한 심사를 내비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澤稚」라는 작품을 들고, 그것이 울산군수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즈음에 지어진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보았다. 매우 위험한 추정이지만, 관련 자료가 소략한 상황에서 조금 과감한 상상을 해 본 것이다. 마지막으로 숙천도호부사 시절에 지은 「聞雁 有感」은 아마 문익성이 남긴 마직막 시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는 벼슬에서 완전 히 물러나 여생을 마무리할 뜻을 굳힌 상태에서, 다시 고향을 떠나 평안도 숙천 에 부임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삶을 마쳤다. 이 시에서는 나 라를 걱정하는 마음과 함께 인생의 종착점을 목전에 둔 비장함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남명학파와 관련된 각 가문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필자는 이번에 남명 조식의 문인인 文益成 및 그의 후손의 활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합천에 거주하던 문익성은 문과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거쳤다. 그의 아들 문 려도 마찬가지로 문과를 거쳐 중요 관직을 역임하였고, 문할도 진사시에 합격 하였다. 두 형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형제간의 우 애도 돈독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다. 이런 행적으로 인해 그들의 가 문은 경상 우도에서 손색없는 사대부 가문으로 자리잡게 된다. 진주로 이거한 문할의 후손들은 이후에도 이런 사족 가문의 전통을 계승하면 서 진주에서 명망가문으로 뿌리내리게 된다. 그들은 선조의 가학을 잇는 입장 에서 남명학파의 맥을 이어갔고, 또 조선 후기의 정치적 변화 속에서 남인 입장 을 견지하였다. 다른 사대부 가문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멸망한 명나라를 대신해 中華문화를 굳건하게 이어 간다는 입장에서 존주의식을 꾸준히 계승해 가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그들 가문에 대대로 전해지던 大明花의 보호・전승을 통해 이를 실천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