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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松溪先生으로 알려진 申季誠(1499-1562)은 흔히 南冥 曺植의 ‘畏友’ 로 언급되고는 한다. 송계는 平山을 본관으로 하는 고려 건국의 충신인 壯節公 申崇謙의 후예로 연산군 5년 밀양 후사포리에서 출생해 명종 17년에 향년 64세의 일기로 삶을 마친 인물이다. 하지만 송계 신계성의 행적은 문학이나 사학, 혹은 철학계에서 그리 주목을 받지 못한 분이다. 다만 사학계에서는 조선전기 영남 지역의 사림 학맥을 고찰하면서, 혹은 남명 조식의 학술적 면모를 언급하는 과정에 잠시 언급되고는 할 뿐이다. 하지만 송계가 영남 지역 사림의 한 부분을 대표하며 남명과 함께 언급된다는 점에서 학계가 간과할 수 없는 인물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밀양이라는 지역은 이미 삼한시대에 김제의 벽골제, 제천의 의림지와 함께 수산제와 같은 수리 시설을 갖춘 농경 지역이었다. 또한 낙동강을 이용한 漕運倉의 운영은 물론 嶺南大路의 거점에 놓인 嶺南樓라는 조선3대 누각에 꼽히는 문화적 존재가 증명하듯 주변 지역과의 관계망을 갖춘 경제의 중심으로서 근대 전환의 시점 까지 활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은 지역적 기반을 바탕으로 春亭 卞季良(1369-1430)과 佔畢齋 金宗直(1431-1492)의 뒤를 이어 사림의 중망을 얻은 송계와 같은 인물의 등장이 일견 자연스럽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송계 신계성의 면모와 학적 형상은 춘정과 점필재에 비해 그리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남명을 비롯해 명종 때 領相을 지낸 東皐 李浚慶, 錦溪 黃俊良 등의 언급을 볼 때 영남 사림의 한 부분인 송계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을 듯 하다. 송계가 남명, 黃江 李希顔과 세상에서 嶺中三高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본고는 송계 가문의 밀양 정착 과정으로부터 후대인들의 송계 추숭 과정을 살펴 그의 영남지역에서의 위상을 엿보고자 한다.